(가오슝편) 집순이도 여행을 좋아한다.
"주말에 또 어디 안 나가셨어요? 집에서 할 게 뭐가 있어요?”
이미 지난주에도 집에 있다는 걸 파악해 버린 내향인과는 멀어 보이는 직원의 물음에,
‘할 게 얼마나 많은데요, 어제 택배 도착한 니트를 소중하게 빠느라 오랜만에 손빨래도 했고, 찬장에 남은 통밀가루가 아까워 어떻게 소진할지 고민하다 오후에는 통밀 초코칩 쿠키도 만들었고, 저녁에는 웬일로 TV에서 재밌어 보이는 영화를 해 주길래 그거 조금 보다가 오옷! 유튜브 알고리즘이 추천해 준 밴드 음악이 딱 제 취향이라서 반복해서 듣다 일찍 잔걸요, 후후 말하다 보니 숨차네요. 한 게 너무 많아서요.’
라는 수다스러운 말을 꾹 삼키고
“딱히 하는 건 없어요, 빈둥거렸죠, 뭐.”라며 결국 재미없는 답변을 내놨다.
답변에서 알 수 있듯이 집에서 설령 특별한 에피소드 없이 침대에 파묻혀 노래만 들은 날도 괴롭거나 심심할 새 없는, 나는 꽤 만족해하는 내향인 집순이 되시겠다.
제일 좋아하는데 야속한 주말은 어차피 지나갔고, 출근하면 그새 수신된 새로운 메일에 답장하고 급한 업무를 처리하며 휴... 어찌어찌 남들 다 앓는 월요일이 반 지난 오후,
할 일이 틈틈이 적힌 탁상 달력을 한 장 한 장 꼼지락거리며 살피고 내 남은 연차와 비교하기 시작한다.
언제 쉬면 내 적은 연차휴가로도 최대한 알뜰하게 여행 갈 수 있나 궁리하는 게 월요일 오후의 작은 취미이자 소소한 낙이 됐다.
올해로 연차가 하루 늘었는데 이 연휴(빨간 날)는 섬에서 나가는 것부터 막히겠다, 모두의 엉덩이가 들썩거릴 때는 자중하자, 하다가 의외의 쉴 틈을 발견하면 작게 야호를 외친다.
설령 휴가 날짜가 정해졌더라도 달력은 봐줘야 맛이다.
보고 또 보고 으흐흐 웃는 즐거움은 덤이니까!
혹시나 다음 주에도 나의 주말을 묻는 이가 있다면
‘주말 동안이요? 환율 한 번 스윽 봐주고, 거기 호스텔 물가는 어느 정도인지 숙소 사이트도 가볍게 살펴봐 줬죠.’라는 말은 또 삼키겠지.
대신에 작게 으흐흐 하고 속으로만 웃는, 나는야 어쩔 수 없는 의뭉스러운 내향인 집순이 여행자다.
지인들이 내가 여행을 갈 계획이거나 갔다 왔다는 걸 알면, 다수의 반응은 아래 중 하나다.
“여행~? 좋겠다.
돈 많이 안 들었어? 나도 가고 싶은데 시간(또는 돈)이 없네,
그나저나 집순이인데 여행 좋아하는 거 보면 신기하다니까? ”
나의 답은 거의 비슷한데
“난 돈이랑 시간 중 하나라도 있으면 가는 편이니까”
자랑할 의도는 전혀 없는 나의 진짜 상황이다.
돈이 많아서는 전혀 아니고 시간도 마찬가지, 그저 다른 데 사용할 예산을 여행에 몰아서 쓰는 정도랄까.
시간이야 달력 신공을 발휘하여 나의 권리인 연차를 최대 활용해서 가능하고.
그중에 둘 다 있을 때는 멀리도 가능하다는 얘기다.
그리고,
어떤 상황과 관계에서도 자주 숨곤 하는 터라 그때 여행이 나에게 숨는 공간이 되어준 적이 많다.
숨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떠났고 떠날 예정이다.
다만 가정에 시간을 쏟거나 대출금 갚느라 여행은 사치라는 지인 앞에서 여행 얘기는 가급적 꺼내지 않는다.
나의 고군분투 여행일지라도 부러움의 대상으로 보이는 게 두렵기 때문이다.
섬 밖으로 나갈 일 없고 여행에 관심이 없는 지인에게도 다르지 않다.
그래서 내 여행의 증거는 거의 내 일기와 사진첩, 그리고 여권 속 도장에만 존재했었는데 내 나름대로 기존의 내 여행기를 정리하고 싶어졌다.
어쩌면 더는 예전만큼 훌쩍 떠나지 못해서일 수도 있고, 일상 도피력이 한층 낮아졌을 수도 있고.
다양한 이유가 차곡차곡 쌓여서 내향인에다 집순이여도 굳이 섬을 떠나 먼 곳에 가 닿아야 새롭게 사는 것 같았던 도피 여행을 써보려고 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최신 기록도 아니어서 갸웃거릴 순간들마저 오히려 작고 소중해져서 한 글자마다 여행의 냄새를 꾹꾹 눌러 담아 연재를 시작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