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 대, 그 미묘함에 대하여 #6 - 똥차와 벤츠

우리는 왜 자꾸 사랑에 실패할까

by 홍마담
똥차 가고 벤츠 온다.


수많은 이별 고민에 대한 최다 공식 위로. 똥차 가고 벤츠 온다.


사람들의 평균 연애 횟수는 얼마나 될까. 신뢰할 수 없는 한 통계에 따르면, 그러니까 페이스북이나 여타 SNS에 떠돌아다니는 가십성 자료에 의하면 결혼 전 미혼 남녀의 평균 연애 횟수가 4.2회라고 한다. 나와 주변인들의 케이스를 보자. 개인별 차이가 아주 많이 나긴 하지만 평균을 내보면 정말 틀린 말도 아닌 것 같다. 그러면 이 4.2회의 연애 경험을 통해 사람들은 정말 똥차에서 벤츠로 옮겨 타고 있는 걸까?


이별 공식 위로에 따라 똥차가 가고 벤츠가 온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벤츠는 완벽하지 않았다. 벤츠도 떠나버린다. 그 자리를 벤틀리가 메운다. 마이바흐가 온다. 부가티가 온다. 롤스로이스가 온다. 4.2회의 연애 경험을 통해 나와 내 주변인들은 이제 모두 슈퍼카의 차주가 되어 있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라. 정말 그런가?


당연하게 서른이 넘으면 이제는 좀 괜찮은 사랑만 골라할 것 같다. 물론 사랑의 완성됨이라 확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누군가는 결혼을 하기도 한다. 어쨌든, 서른이 넘었음에도, 그럼에도 여전히 고약한 사랑들이 남아있다. 초조해진다. 불안한 방황이 계속된다. 우리는 왜 자꾸 실패할까. 왜 우리 주위는 똥차 밭인가. 내 안목은 정말 똥이란 말인가?



K의 연애 공표 이후로, 우리 사이의 화두는 단연 K의 연애였다. 얼마나 궁금했던지 점심시간에 맞춰 Y에게 전화가 왔다.


“K 남친 생겼다며. 뭐래? 어떻대? 괜찮대? 너가 들어보니까 어때?”


Y의 속사포 랩을 들으며 나는 생각한다. 여자들의 시간은 모든 것이 궁금하고 즐거웠던 열일곱의 언젠가에 멈춰있는지도 모른다고.


“아줌마가 되더니 왜 이렇게 오지랖이 더 넓어졌어. 일 안 바쁜가 보다?”


“아니, 걱정되니까 그렇지. 아무렴 전에 걔보다는 낫겠지. 안 그러냐, 홍주연? 근데 왜 그렇게 빨리 사귄 거래?”


“나 회사야. 일 많아. 바빠. 끊는다.”


K의 진지한 연애를 가벼운 가십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닐까 불편해져 서둘러 통화를 마쳤다. 그러나 어쩌면 그보다 나는 들킬까 두려운 마음이 컸는지도 모른다. K의 연애에 대한 의구심, 불안함과 K에 대한 죄책감, 미안함이 한 데 엉킨 감정을. 예컨대 K가 만난 남자가 이번에도 똥차는 아닐까. 하는 그런 미안한 의문 말이다.




“주연 씨, 통화 끝났어요? 많이 바쁜가 봐요.”

옆 팀 남직원 정 대리다. 나보다 세 살 정도 많은, 오가다 마주치면 목례 정도 하는, 워크숍이나 사내 행사가 아니면 대화할 일 없는, 그런 데면데면한 사이. 이 데면데면한 사이의 남자가 굳이 나의 통화가 끝났음을 확인한다는 것은 내게 명확한 용건이 있다는 뜻인데 나는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는다.

“아, 아니요. 어쩐 일이세요?”

대답을 함과 동시에 정 대리의 손에 눈이 간다. 아니, 정확히 그의 오른손에 쥐어진 포멀한 형태의 네모나고 빳빳한 흰 종이에 눈이 간다. 아, 이런. 청첩장이다. 참나. 그럼 그렇지, 이것이 아니라면 내게 친근하게 말 걸며 다가올 리 없는 사이가 아닌가.

“하하. 저 다음 달 말에 결혼하거든요. 부담 갖지 말고 그냥 와서 밥이라도 먹고 가요.”

밥이라도 먹고 가긴. 벌써부터 통장에서 빠져나갈 돈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려온다는 것을 그는 정말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단 말인가.

서른둘이 되어 크게 바뀐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일 번으로 아마도 배로 늘어버린 경조사 비용을 꼽을 것이다.

한 이년 전까지만 해도 청첩장을 받을 때마다 신기하고 벅찬 감정이 있긴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 내게 청첩장이란 매달 날아오는 고지서보다도 부담스러운 존재일 뿐. 그런데, 정 대리. 우리가 정녕 이럴 사이인가?

“어머, 애인이 있었어요? 정 대리님, 얼마 전에 헤어지지 않았어요?”

제발 그냥 잔말 말고 축하해 줘, 홍주연. 고지서 배달에 언짢아진 감정이 굳이 필요 없는 뾰족한 말과 함께 던져진다. 나의 비뚤어지고 못난 마음을, 이젠 그 역시 충분히 눈치채고야 말았으리라.


“아, 하하. 네, 어쩌다 보니. 아이, 전이랑은 다르죠. 아, 저도 이제 그만 방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눈에 확신이 들어서요. 꼭 오세요.”

나의 뾰족한 말을 받아치는 건지, 아님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건지 그가 여러 번 과장되게 웃는다.

“아 네. 축하드려요. 별 일 없으면 참석하도록 해볼게요.”

별 일이 생길 테지만요. 나의 이 못나고 비뚤어진 마음은 그의 ‘확신’이라는 다소 비장한 단어까지 자꾸 신경 쓰게 만든다. 확신이라. 무엇이 방황하던 이 사람에게 확신을 주었나.

[야, 그렇다고 냉정하게 전화를 끊냐. K 때문에 전화한 거 아냐. 내일 남편 출장 가는데 일 끝나고 오랜만에 우리 집에서 자. 픽업 갈게. 어때?]

Y의 카톡이었다.




결혼 전에는 Y가 혼자 살았던 오피스텔에 모여 배달음식을 시켜 먹으며 수다를 떠는 게 일상이었던 때도 있었다. 그때보다 세 배는 더 넓어진 집. 마지막으로 Y의 집에 온 것이 삼 년 전 Y의 집들이 때가 아닌가. 나는 그 ‘공식적인’ 기혼자들의 행사를 통해 Y의 공간이 이제 더 이상 우리들의 공간일 수 없음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Y가 결혼했다는 사실에 대한 실감과 함께 Y와 나와의 거리감이 느껴졌던, 함께였던 세계가 둘로 나뉜듯한 미묘한 감정도.

거실 벽에 걸린 커다란 웨딩사진 액자에 눈길이 간다. 이것은 성스러운 상징이다. 스무 살을 지나 미성년을 벗어난 성인에서 나아가 이제야 진정으로 독립한 어른이 되었다는 사회적 상징. 그리고 그 액자 속 누구보다도 행복해 보이는 표정의 그들이 있다. 불안감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확고하게 사랑을 이루었다고 주장하는, 아주 완고하고 강력한 관계임을 증명하는 것 같은.

“야.”

“응?”

“너 지금 신랑 처음 만났을 때 딱 이 사람이다, 확신이 들었어?”

“뭐야, 갑자기 왜?”

정 대리의 '확신'이라는 단어가 못내 신경 쓰인 탓일까. 근황 토크마저 건너뛰고 밑도 끝도 없이 불쑥 내뱉은 내 질문에 커피를 내리려 분주히 움직이던 Y가 황당함과 호기심이 섞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아차, 내 얘기로 착각할 수도 있겠구나.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본론을 꺼냈다.

“아니, 어제 우리 회사에 어떤 남자가 청첩장 갖다 주면서 한눈에 확신이 생겼다고 하잖아. 그냥 궁금해서”

“청첩장 주면서? 야, 그땐 다 그렇지. 환상 있을 때잖아.”

환상이라. 자신과 인생을 함께할 영혼의 동반자가 어딘가에 존재하리라 믿고 있는 누군가가 어느 날 놀랍게도 그의 기대를 충족해줄 만한 짝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 그들은 한순간에 열정적 사랑에 빠지게 된다. 곧바로 그들은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며 한 집, 한 침대에서 평생 함께 할 것이란 결심을 하게 된다. 그런 낭만적 믿음, 낭만의 절정에 존재하는 것이 결혼이 아니던가.

나 또한 서른몇 해를 살며 수많은 러브스토리들을 목격해 왔다. 그러나 그 낭만주의에서 발생된 믿음, 그 확신이 그야말로 환상 속에나 존재하는 러브스토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이들 또한 얼마나 많았던가.

“한눈에 확신할 수 있다면 아무도 이혼하지 말아야지. 요상한 육감 믿고 인생 내던지는 거, 그거 별로야.”


이것이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다. 때가 되면 다 알게 될 거란 식으로 말하며 짐짓 오만하게 굴지 않아서. 아직까지는 ‘자발적으로’ 결혼을 선택하지 않은 비혼 여성인 나의 반항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아서.

“근데 주연아. 그건 있어.”

“뭐.”


“너 알잖아. 나 어렸을 때 집착하는 남자들만 만난 거. 웃긴 게 그땐 그게 좋았어. 맨날 봐야 되고, 하루 종일 연락해야 되고. 다른 남자 있는 덴 절대 가면 안 되고. 근데 그게 내 연애 스타일이었다? 생각해보면 나한테 뭔가 결핍이 있었던 거지.”


“알아. 아니 근데, 결핍 없는 사람이 어딨어. 그리고 당연히 나한테 부족한 부분을 찾는 게…”


그게 당연히 사랑이 아니야?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뱉다가 멈췄다. 잠시 내 생각들을 정리하고 싶었다.

내게 사랑은 결핍에서 강력하게 온다. 내 사랑은 언제나 결핍에서 만들어진 결과였다.

나는 상처가 돋아난 고독한 사람들을 사랑했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나는 고독한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서로를 치유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왔다. 그리고 그것만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화초처럼 자라난, 고독을 모를 것 같은 사람에게는 기대감이 없었다. 나는 그런 이들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저들은 고독을 모른다. 저들은 결코 나를 치유해 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나의 오목하게 빈, 부족한 곳을 사랑으로 메워야만 했다. 타인을 통해서. 어쩌면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이건 안 맞네. 어쩌지, 네가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아는데,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은 아닌가 봐. 그리고 나는 이별을 하고 또 비슷한 사랑을 했다. 나를 메워주길 바라는 수많은 만남들이 있었다. 결코 맞을 수 없는 요철을 억지로 맞추려고만 하는 만남들.

“생각해보면 그때 되게 힘들었던 것 같아. 근데 더 웃긴 게 뭔 줄 아냐? 헤어져도 또 그런 사람을 만나고, 그리고 또 헤어지고, 또 그런 사람 만났던 거. 마실래, 커피?”

Y가 건네준 커피를 받으며 Y가 만났던 남자들을 떠올렸다. 강해 보이고 소유욕이 넘쳤던, 외모는 달랐어도 어딘지 모르게 비슷한 느낌을 풍겼던 그들. 그리고 그 비뚤어진 소유의 사랑에서 안정감을 느꼈던 Y. 그러나 소유의 사랑은 너무도 빠른 에너지의 고갈을 일으켰고, 그 끝은 언제나 깔끔할 수 없었다.

짜디짠 바닷물을 아무리 마셔본들 어찌 갈증을 해소할 수 있을까. 만남이 수없이 반복된다고 한들 애초에 잘못된 만남이었다면 상처는 결코 치유될 수 없는 것이다.


“아, 너 걔 생각 안 나? 나 아주 잠깐 만났던 남자 친구. H. 걘 정말 괜찮다고 그랬잖아. 애들이.”

“H?”


문득 생각이 났다. Y가 대학시절 연합동아리에서 만났던 동갑내기 남자아이. 멀끔하고 준수한 외모에 매너도 좋고 겸손함까지 갖추어 당시에 친구들이 완벽한 남자가 나타났다며 어찌나 호들갑을 떨어댔던지. 그러나 우리의 Y는 의외로 감흥이 없었다.

“걔, 지인짜 집착도 없었고 나를 존중해줬거든. 웃긴 건 그땐 내 성엔 안찼다는 거야. 미쳤지. 근데 생각해보면 그땐 내가 자꾸 건강하지 못한 사랑을 갈구했던 것 같아. 뭐… 그래서 쫑난 거지. 뭐.”

“야, 맞아. 생각난다. 진짜 미쳤었다. 걔 진짜 괜찮았는데. 벤츠 내팽개치고 꾸역꾸역 똥차만 만난다고 얼마나 애들이 너 뒷담 깠는지 모르지? 눈깔이 삐었냐구.”

내가 쿡쿡거리며 웃자 Y가 따라 웃는다. 웃기는. 그때처럼 Y가 이해가 가지 않던 때도 없었다. 당시 친구들은 ‘아니 도대체 왜 멀쩡한 남자를 마다하고 굳이, 굳이 그런 힘든 길을 선택하느냐’고 Y의 뒤에서 자주 열변을 토하곤 했으니까.


“벤츠? 남자가 벤츠면 뭐해. 내가 무면허였는데.”

무면허라. 평상시 진지하면서도 감성적인 Y와 딱 어울리는 표현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이어지는 말이 나올 그녀의 입을 주시한다. 꼭 다문 얇고 작은 입술이 오늘따라 유달리 이지적으로 느껴졌다.

“하여튼 예전엔 내가 진짜 운이 없다고 생각했거든? 왜 항상 이상한 남자만 꼬이지? 남자 복이 없는 팔자인가? 싶기도 했고. 야 나 그땐 진짜 점 보러 가야되나 그런 생각도 했다니까.”

“에이. 인연이 아니어서 그렇지. 너희 신랑, 그때 만났으면 또 모르지.”

“아니, 절대. 그 때 만났다면 아마 내 신랑도 제2의 H가 됐을 거야.”

빈 틈 없이 확고한 Y의 대답에 나는 어디선가 읽었던 문구를 떠올린다. 모든 선택은 자유로운 선택이 아닌, 당시의 역량이 허락하는 유일한 결정이라고 했던 스피노자의 말. 아마 내가 '변하지 않은 나'인 이상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 역시 같은 선택을 할 것 임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너네는 다 아빠가 계시니까.”

세 살 때 사고로 돌아가신 Y의 아버지 이야기는 우리 사이의 암묵적 금칙어 같은 존재로 자리 잡고 있었다. 기일에도 쉽게 꺼내지 않던 이야기. 웬일일까. 예상치 못했던 Y의 말에 나는 내 시선을 머무르게 할 곳을 잃고야 만다.

“나중에 알았어. 남들은 독립적이고 싶어 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구속받고 싶어 하지? 왜 병신같이 그게 좋지? 근데 내가 결핍이 있어서라는 거, 그걸 그냥 받아들이고 나니까 달라지더라."

아직 따뜻함이 남아있는 커피. 애꿎은 커피 잔만 만지작거리다 문득 청첩장을 쥐고 있던 정 대리의 확신이라는 단어와 그의 상기된 얼굴을 떠올린다.

“한 눈에 확신은 몰라도, 적어도 면허는 있나보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걸까. 작고 얇은 입술의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Y가 말했다.


그녀는 내게 말하고 있다. 치유가 된 자가 아프지 않은 사랑을, 건강한 사랑을 할 수 있다고. 그리고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 어디에서 결핍이 왔는지를 보는 것, 그것이 치유의 시작이자 방법이라고. 그리고 그 치유는 오로지 나 자신을 통해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커피를 마시는 Y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액자로 눈길을 옮겼다. 내가 느낀 그 확고한 사랑은 어디에서 오는가. 요철이 꼭 맞는 퍼즐 같은 두 사람이 만나서 완전함을 이룬 것이 아니다. 나의 결핍을 타인에게서 채우지 않는다는 것, 나를 바로 볼 수 있는 용기로 시작된 그 사랑은 결국 단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얘들아 바빠? 나 너희한테 할 말 있는데.]


K에게 온 카톡이었다. 나는 정말이지 K를 과소평가했는지도 모른다.




똥차가 오고, 똥차가 가고, 또 똥차가 온다. 아직까지도 왜 우리들은 자꾸 사랑에 실패할까? 벤츠남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걸까? 나는 이 질문이 너무나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잘 안다. 인터넷의 수많은 벤츠들. 그 드라마 같은 이야기 속 '어떤 벤츠가 왔는지'에 '얼마나 성장한 사람이 있는지'는 묻혀버리곤 하니까.


나는 생각해본다. 나는 언제 나를 온전히 들여다보았는지. 어쩌면 지금까지의 나에게 사랑은 그저 남을 통해 내게 부족한 결핍을 채우려는 시도에 불과했는지 모른다. 합이 맞지 않는 퍼즐을 억지로 깎아내고 맞추려 힘을 가하면서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고 체념해 버렸는지 모른다. 그리고 빈틈없이 내게 꼭 맞는 퍼즐, 영원히 오지 않을 벤츠를 마냥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겐 타인이 아닌, 스스로 나의 결핍을 메우는 과정이 필요하다. 온전히 나의 결핍을, 또 온전한 나 자신을 마주할 시간이 필요하다. 사랑은 구원이 아니다. 타인의 퍼즐을 기대하지 않을 때, 온전히 내가 나로서 자립할 수 있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그제야 단단한 사랑은 시작될 수 있다.


K가 이번에 만난 남자가 어떤 차이면 어떠랴. 어쩌면 K는 이번엔 달리는 차에서 온 몸을 내던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우리는 이제야 나 자신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은 성숙해진 서른둘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서른의이별] 무뎌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삼십대소개팅] 우리는 왜 서로에게 반하지 않는가.

홍마담쌀롱 유튜브: https://www.youtube.com/channel/UCMVI-WRQYPQFToxaq4Nn04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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