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잔치국수

by 홍시

어머니는 명절에 차례 지내러 내려가면 음식준비에 한창이십니다. 부침개재료부터, 나물, 고기, 탕국, 설에는 떡국, 만두, 추석에는 송편이고요.

중학생 때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시골에는 더 이상 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웠던 고향, 풀냄새, 송아지의 커다란 눈망울은 볼 수 없게 되었지요. 시집온 후 다시 펼쳐진 명절 풍경이 재밌기도 합니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송편을 빚고, 만두를 빚는 모습이요. 하지만 몸이 부서져라 가족을 위해 일만 하는 어머니 밑에서 산처럼 쌓인 설거지거리, 찾아오는 손님들의 새로 매번 차려내는 상차림, 서서 내내 만들고, 치우고 힘이 듭니다. 음식 만드는 사람, 앉아서 술 먹고 떠들며 놀기만 하는 사람 따로 있는 이런 상황까지 반갑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좋아하는 부침개가 이 순간만큼은 지독한 기름냄새로 한입도 입에 대기 싫은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코로나 이후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어느새 찾아오던 가족들은 하나둘씩 발길이 뜸해지고 아버지, 어머니, 저와 남편, 홍시만 그곳에 있습니다. 어머니는 먹고 싶은 음식만 해서 먹자고 말씀하십니다. 갈비, 잡채, 나물, 어머니의 먹고 싶은 음식은 차례음식의 연장선입니다. 그러다 조용한 점심시간 고소하고 비릿한 냄새가 올라옵니다. 배가 부르다며 안 먹겠다고 손사래 치던 저는 시원한 국물 냄새에 부엌으로 이끌려 들어갑니다. 투명하게 우러난 멸치, 다시마육수가 냄비에 보글보글 끓고 있습니다. 다른 냄비에는 뽀얀 소면이 보글보글 끓고 있고요. 납작한 프라이팬에 갖가지 고명들이 춤을 춥니다. 노란 계란 지단, 파릇한 호박볶음, 알록달록 당근볶음, 까만 김가루까지 내가 먼저라며 손을 듭니다. 그렇게 한 그릇 가득 차려내면 " 저도요. 저 먼저 주세요!"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아침 먹은 것도 아직 소화되지 않았는데 어서 들어오라며 침을 꿀꺽 삼킵니다.

겨울면을 떠올리면 그때의 한 그릇 가득 잔치국수가 떠오릅니다. 하지만 얼마 전 어머니는 갑작스러운 암선고에 큰 수술을 받고 천천히 체력을 회복하는 중이십니다. 그렇게 영원할 것 같았던 어머니의 푸짐하고 아낌없는 잔치국수는 기약 없는 이별을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어머니의 손맛은 대를 이어 남편에게로 전해졌거든요. 남편이 어머니의 영양보충을 위해 끓여낸 아롱사태곰탕은 놀라울 정도로 부드럽고 맛있었습니다. 고기냄새가 역해 못 드시겠다는 어머니도 살살 녹는다며 곰탕 한 그릇은 뚝딱 해치우셨거든요. 이제 어머니가 드실 남편의 잔치국수도 기대해 봅니다. 고소하고 시원한 투명한 잔치국수의 국물을 한입 떠먹고 무지개 같은 고명을 섞어봅니다. 그렇게 국수를 한입 후루룩. 온갖 세상의 맛이 입속에 퍼집니다. 그렇게 우리 집의 잔치국수는 또 다른 손으로, 손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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