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교수 5인의 한국형 복지국가, 복지정치의 두 얼굴
《복지정치의 두 얼굴》은 한국이 복지국가로 거듭나기 위해서 필요한 일에 대해서 서울대에서 2014년에 수행한 연구 내용이다. 스웨덴과 그리스 중심으로 한국의 길을 사회복지학, 경제학, 사회학, 언론학, 정치학 분야로 나눠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
다섯 개의 글 가운데 두 글은 결국 일관성 있고 책임 있는 복지국가 건설은 합의제 민주주의에 달려 있다는 주장이다. 우선 서구와 한국의 사정이 많이 다른데, 환경 차이를 빼 놓을 수 없다. 복지 확대 당시 서구는 경제 활황기였다. 성장하는 경제를 믿고 국가가 복지의 직접 공급자가 되어 서비스하는 방식에 걸림돌이 될 문제가 없었다. 반면, 한국은 이미 저성장 국면이다.
거리낌 없이 복지를 확대하던 서구는 저성장 시기를 맞았고, 복지 구조를 재편성했다. 국가가 직접 제공하던 복지 서비스 일부를 민영화하고 국가는 이를 지원하는 투자로 역할을 축소했고, 증세와 수혜 대상자도 조정했다. 저항이 없을 수 없다. 이 곤란한 개혁을 할 수 있었던 요인이 바로 합의제라는 것이다.
합의제의 핵심은 다당제다. 어느 일방의 독주를 막기 위해 다양한 정당을 제도 정치에 진입시키는 방법은 비례대표제, 즉 지역 이익에서 자유로운 비례대표 중심 의회 운영이다. 모델로 삼고 있는 독일식에 따르면, 국회의원 증원이 필요하다. 이들은 현재 한국 국회의원 한 명이 대표하는 유권자 수가 지나치게 많다면서 증원 필요성을 말한다.
한국인에게 일하지 않고 싸움질이나 하면서 놀고먹는 대표적인 사람이 국회의원이다. 걸핏하면 국회를 없애버리라고 하는 마당에 국회의원 증원이 필요한 방식을 강조하는 모습 때문이다. 그런 일이라면, 적어도 놀고먹으면서 싸움만 하는 사람들이란 고질적인 편견부터 깨야 하는 것 아닐까.
비례대표제 도입 실패는 이미 예견됐다. 2012 선관위에서 비례대표제를 건의했을 때, 두 정당 모두 시큰둥했다. 한쪽에서는 영남에서, 다른 한쪽에서는 수도권에서 표심을 잃을 것으로 예측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득 한쪽에서 비례대표제 도입을 적극적으로 들고 나왔다. 갑자기 자기 이득을 버리고 대의를 위해 희생해야겠다는 마음이 불끈 솟은 걸까?
두 저자 모두 최근 칼럼과 인터뷰에서 지적하듯 결국 공수처 설치라는 자기 목적을 달성하는데 소수 정당 힘을 얻으려는 술수에 지나지 않았다. 유권자 비난을 피하기 위해 연동형 캡이라는 기이한 방식을 채택한 것이 그 사실을 말해준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옛말이 이처럼 들어맞는 일도 없을 것이다.
한 명은 위성정당을 만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그래도 반성 비슷한 고백을 하는 반면, 다른 한 명은 두 정당을 비난한다. 나는 먼저 반성해야 하는 측은 정치권보다 지식인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인과 정당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게 어제오늘의 일인가. 새로운 제도를 제안한다면, 이기심에 따라 정도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 아닐까. 현실이 학자의 이론이나 예측대로 움직인다면, 세상은 낙원일 것이다. 제도를 연구하는 지식인조차 도덕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정치를 바라보는 태도를 싸움박질만 하는 정치인과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 정치 제도보다 먼저 돌아봐야 하는 것 아닐까.
무엇보다 이제는 제도를 바꿔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그 효율이 너무 낮다. 제도가 갖춰지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사회의 근대성이 낮았던 시대에는 제도를 바꿈으로써 문제가 개선되는 효과를 체감할 수 있지만, 지금은 그런 시기를 지났다. 제도보다 그 제도를 실제로 작동시키는 사람의 태도가 중요하다. 유권자 사표 문제라면 모를까 국회의 협의 문제는 제도보다 그 운영자인 의원과 유권자에게 달려 있다.
나머지 글은 당위성보다는 현실을 알려준다. 〈그들은 어떻게 복지 이슈를 이용하는가〉는 언론과 정치권의 역학관계를 설명하면서 복지가 포퓰리즘으로 흐르는 언론과 정치권의 현실적 한계를 보여준다. 언론과 정치권에 대한 대중 영향력은 막강하다. 치열한 경쟁 환경 속에서 언론은 시청률을, 정치인은 지도부보다도 대중의 평판을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들은 대중이 가장 관심 갖고 있는 부분에 대한 다수 의견을 반영한다. 언론은 대중이 꺼리고 흥미 없어하는, 어렵고 갈등이 적은 이슈보다 쉽고 갈등이 첨예해서 자극적인 이슈를 부각하면서 포퓰리즘을 자극하게 되고, 정치권은 지지를 얻기 위해 다수 의견을 반영하려고 경쟁하면서 서로 비슷한 주장으로 수렴한다. 동시에 경쟁 세력과는 다르다는 차별성을 부각해야 하다 보니 싸움을 위한 싸움, 즉 일부러 갈등을 일으키는 방향으로 흐른다.
그렇다면, 역시 가장 중요한 건 유권자다. 아무리 정치 제도를 이렇게 저렇게 고쳐도 유권자 요구가 불분명하거나 모순적이면 정치권이 협의하기 어렵다. 〈소통 가능한 나라가 지속 가능한 복지를 만든다〉는 똑같이 경제 위기에 복지국가로의 전환을 시도한 스웨덴과 그리스가 성공과 실패로 상반된 길을 가게 된 주요한 원인은 국민에게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국민의 이념 지향과 정책 선호가 얼마나 일관성 있느냐다.
스웨덴은 오랫동안 좌파 정당인 사민당이 집권했어도 국민이 갖고 있는 이념은 우파적이며 정책 선호 역시 사유재산권 보호와 자유경쟁 시장 경제에 부합했다. 기업 중심 구조 개편으로 고용유연성을 제고하고 법인세 상속세를 축소하고 동시에 일반 다중의 세부담을 강화할 수 있었던 게 국민의 우파적 이념 성향과 사유재산권, 자유경쟁 시장 정책 일관성 덕분에 노조 등도 적극 동의하면서 가능했던 것이고 정치권은 그러한 구조조정에 따른 대안으로 복지 장치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가 오늘날 그 모습이다.
반면, 그리스는 국민이 갖고 있는 이념과 정책 선호에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심지어 모순적이다. 예를 들면, 평등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성과는 능력에 따른 차별을 선호하고, 자유를 중요한 가치라고 하면서 기업은 국가가 소유해야 한다는 식이다. 이런 상태에서 복지 논의가 이루어지다보니, 포퓰리즘이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다른 여러 요인이 있지만, 국민의 이념과 정책 요구가 일치했다면 시간이 걸릴지언정 지금과 같은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식 조사 비교에 의하면, 한국인은 이 이념 지향과 정책 일관성 사이 괴리가 그리스보다도 큰 편이다. 지금도 그런 걸 엿볼 수 있다. 가벼운 예로는 외국인, 특히 서구 사회 사람이 한국산 제품이나 서비스를 칭찬해 주는 걸 유난히 흐뭇해하고 좋아하면서 특정 기업에 대한 최근 어느 지자체장의 조치나 발언을 두고 칭찬하며 정치 권력자로서 그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제고하는 현상이다. 세무조사가 사업자에 대한 협박 수단으로 사용되고, 문제만 생기면 국가가 사업모델 도용하는 걸 잘했다고, 그런 조치를 취해야 정치인이 제대로 일한다고 박수치는 사회에서 새로운 사업 모델을 시도하고 세계적 기업으로 키우려는 의욕이 생기기 어렵다. 독점이 문제라면 정부가 할 일은 다른 경쟁 업체가 생기도록 규제 완화 등을 통해서 시장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한국 기업이 세계인의 사랑 받는 걸 원하는 국민이라면 정부에게 이런 조치를 요구하는 것이 일관성 있는 것이다.
아직 본격 논의 사항이 아니지만 머지않아 논란이 되리라 유력하게 예측되는 기본소득에 관한 이슈, 즉 기본소득을 주장하면서 복지서비스 주체도 국가를 선호하는 현상도 그러하다. 기본소득의 전제는 복지서비스의 민영화다. 이 방식을 구상한 배경이 국가 예산 부담 때문에 복지 방식을 효율적으로 구조조정하려는 목적에 있기 때문이다.
요즘 우한코로나 사태로 언급되는 유럽의 의료서비스 주체가 국가라서 효율성이 떨어지고 한계가 있단 지적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가 직접 운영하는 복지 서비스(실물복지)가 비용 대비 효율이 낮은데, 복지 수요 증가 등 갈수록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 때문에 국가는 개인에게 돈을 쥐어주는 걸(현금복지)로 복지 역할을 축소·변경하고, 의료를 비롯한 복지 서비스를 민간이 수익 맞춰 운영하면서 제공하도록 구조 조정하는 것이다. (스위스 국민투표에서는 이 제도가 부결됐다.)
따라서 기본소득에 대한 이념 일치는 자유 선호이며, 정책 일관성은 복지(공기업) 민영화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 또한 불일치하고 비일관적인, 상당히 모순적인 형태로 나타날 가능성이 적지 않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한국의 저성장은 복지 확충에 있어서 근본 문제가 아니다. 스웨덴 그리스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도 경제성장에 큰 변곡점을 맞이할 때 시장과 기업 중심으로 구조를 개편하면서 그에 수반하는 작업으로 복지 구조 개편 및 확충을 했기 때문이다. 의회가 협의제를 담보할 수 있는 제도를 구축하지 못한 것도 근본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한국인이 갖고 있는 이념과 정책 일관성 사이 모순이 크다는 사실,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