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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주현 Apr 02. 2020

이기적인 "개인 의지의 일탈"과 집단 의지

츠베탕 토도로프, 민주주의 내부의 적(p.119~124)을 읽다가

비행기 사고가 나면 살아남을 가능성은 제로다. 하지만, 우리는 비행기 운행을 문제 삼지 않는다. 원자력 발전소로 인한 위험을 문제  삼는 건 그것이 폭발하면 “통제 불가능한 재앙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 위험은 체르노빌 사고에서 보았듯 원전 없는  국가에까지” 미치며, 후대에까지 지속된다.


저자는 후쿠시마 참사를 예로 들면서, 그 원인에는 특별한 요인이 있다고  주장한다.

“후쿠시마 사태는 지진과 쓰나미가 일어난 후에 발생했다. 발전소는 대도시에서 멀지 않은 바닷가 지진 구역에 있었다.  발전소 운영자 입장에서 이 지역이 수익성 좋고 이용도 편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원전 폭발은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간이 내린  결정에서 비롯된 재해다. 민간 기업과 정부 관료의 결탁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 중략. 기술 남용은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과학 지식을 아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부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혀 신기술을 무절제하게 즉각 사용한다.”  


저자는 원전이나 과학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온난화의 원인을 밝힌다든가 유전자 조작 식품의 작용/부작용을 아는데 과학은  유용하다. 다만, 과학에는 나쁜 과학과 좋은 과학이 있다.

“나쁜 과학은 현재의 과학적 발견 이후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고려하지  않지만, 더 나은 과학은 시공간, 미래 세대와 이웃을 고려한다.”

후쿠시마 참사와 같은 재앙은 나쁜 과학 탓이다.

“더 잘 살기  위한 인간의 열망이나 물질의 비밀을 알고자 하는 바람 때문이 아니라, 인간을 오직 경제적 이익만 추구하는 냉정한 개인 집단으로  보는 신자유주의 논리 때문에 일어났다.”


 나쁜 과학과 신자유주의 논리를 제어하는 수단으로 그는 ‘집단 의지’를  제시한다.

“자연이 아니라 집단 의지가 개인 의지의 일탈에 맞서서 인간을 보호한다. 전체주의 악몽이 집단행동의 평판을 해치지  않았기 때문에 히로시마와 후쿠시마 사태가 일어나도 과학 지식 추구를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과학의 영역을 넓히려는 경향을 보인다.  중략. 집단 의지에 따라 미래의 방향을 결정할 때, 대륙 전반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

경제적 이익만 추구하는 “개인  의지의 일탈”을 집단 의지의 신중하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견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장은 원전 설치 장소에 대한 경제적  이익 중심 결정이 이기적인 개인의 독단적인 결정(“개인 의지의 일탈”)이라는 시각에서 전개된다. 이어서 집단 의지를 그러한  일탈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여기서 집단 의지란 국가(법)를 의미한다.


그러나 회사 법인과 관료가 결탁해서 내린 결정이 독단이라면, 집단  의지인 국가의 결정은 이타적이고 장기적이라는 걸 어떻게 보장할 수 있을까? 이런 주장은 아마도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시스템이  원칙대로 “완전히 모순되지 않으면서도 기원과 지향성이 상이한” 여러 집단에 의해 견제되고 있는 상태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이 견제가 원칙처럼 이루어져서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는가. 관료의 행위는 법(집단 의지)에 의해 구속된다는 점에서 원전 폐해의 주요 원인인 법인과 결탁한 관료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미 그 집단 의지 내부의 결함을 증명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기술의 진보 역시 정반합의 경로를 따른다고  생각한다. 울리히 벡이 서구 사회를 과학과 기술이 번영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기대했던 1기 근대화를 지나 1980년대를 과학이  위험의 근원이라고 인식하는 2기 근대화(위험 사회)라고 분석했다면, 더 발전된 과학이 그 위험을 보완하는 기술을 만들어내는 시기가  3기 근대화 아닐까 하는 것이다. 미시적으로 각 기술은 한 시대에 1기에서 3기가 동시에 존재하면서 발전하는 것이고.


어떤 문제의 원인을 개인의 이기심 탓으로 규정하는 것은 단순하고 간편한 원인 규명이다. 문제 원인이 개인의 이기심 탓이라면,  차라리 개인의 도덕성 함양이 답이 될 수 있을지언정, 집단 의지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자신하는 개인이  그렇지 않은 개인을 억압하는 방식이 아닌 한, 개인과 다른 도덕성을 가진 집단이란 존재할 수 없다. 더구나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자신하는 개인이 주도하는 방식이란, 저자가 비판하는 계몽주의 시대 식민지배나 전체주의 시대의 배제와 차별 그리고 현대 미국과  유럽의 아랍에 대한 폭력적이고 적대적 태도에서 보이는 ‘정치적 메시아주의’라고 할 수 있다. 






 ps. 저자는 과학 발전의 폐해로 원전을 주요 예로 들지만, 원전을 폐쇄한 독일의 에너지 방식 역시 대기 오염을 심화해 기후 변화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지적한다.


(책이나 저자 주장 전체에 대한 의견은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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