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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주현 Jun 30. 2020

자선에 대한 도덕적 선입견과 '개인' 되기

유시민, 청춘의 독서, 맬서스의 인구론에 대하여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 몇 꼭지를 골라 읽고 있다. 내용보다는 독후감이라는 글의 형식을 살펴보려는 목적이다. '맬서스의 인구론' 편을 처음으로 읽었다.


누군가나 어떤 글에 대한 판단은 가급적 삼가하려고 하지만, 조심스럽게 저자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현상을 부인하기 어렵다. 아마 한 때 열렬하게 좋아하고 따르던 저자이었기에 더욱 착잡할 것이다. 어쩌면 그는 세월이 흘러도 세상을 보는 시각이나 생각이 (발전 없이) 그대로 멈춰 있는 것일까. 독재와 싸워야 했던 치열하고 서글펐던 젊은 시절이 그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발목을 꼭 붙잡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맬서스의 인구론'을 부자와 자본가를 옹호하기 위한 이론으로 보는 그의 서술에서 기이하게도 나는 흡사 조선 사대부의 형상이 떠오른다. 뼈 속까지 도덕주의가 새겨져 있는 사람의 시각이랄까. 저자는 맬서스가 편향적인 통계와 자료를 바탕으로 논지를 전개한다며 고의의 혐의를 씌우지만, 빈민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자선이 쓸모 없고 무의미하다는 맬서스의 다소 적나라한 표현에 저자 자신이야말로 도덕적 반감의 선입견을 갖고 편향적으로 해석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맬서스의 인구론을 읽진 않았지만, 유시민이 인용한 문장만으로도 맬서스에 대한 그의 비판은 인구론의 주장과 그 사상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듯한 인상을 준다. 맬서스는 사회적 목표를 '개인'으로 두고 있는 것 아닌가 추측한다. '개인'이란 그저 개별적인 인간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라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설 수 있는 인간에 대한 개념이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추구해야 할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빈자든 약자든 자립하는 인간, 즉 '개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복지 국가 이상향으로 삼는 스웨덴의 목표이기도 하다. 복지 국가 스웨덴에서는 기부 또는 자선을 바람직한 행위로 권장하지 않는다. 기부나 자선은 그 자체로 우열 상태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스웨덴이 국가 차원에서 복지를 시행하는 이유 또한 빈자나 약자가 부자나 강자의 기부나 자선을 필요로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다.


유시민이 비판적으로 인용하는 맬서스의 인구론도 정확히 스웨덴과 같은 의도를 함축하고 있다. 교육을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이 그러하고, 무엇보다 자본가에게 노동력 공급 역할을 주로 하는 빈자 측이 스스로 아이를 적게 낳음으로써 자기 노동 가치(가격)을 높이라고 조언하는 것이 그러하다. 즉, 부자나 강자의 자선이나 구호에 의존하는 방법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값어치를 높이는 재산권 행사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재산권의 '재산'을 물질 가치로만 인식하고, '개인'에 대한 개념이 불분명하며 자선이나 구호를 '선'한 행위로 여기는 전근대적 도덕 관념을 그대로 간직한 상태에서는 맬서스가 의도하는 방법이 냉정한 빈자 모욕, 뻔뻔한 부자 편들기 로 밖에 보이지 않을 법하다.


피임을 죄악시한 맬서스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지금의 잣대로 과거를 판단하는 오류도 드러난다. 맬서스가 여성의 순결을 강조했다면서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대비시키는 부분에서는 혹시 자유연애를 주장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마저 든다. 맬서스가 의미하는 순결은 '소녀상' 따위가 상징하는 그런 종류의 처녀성이 아니다. 결혼처럼 상대에게 정직하고 충실하겠다는 약속을 한 상대와의 신실한 성 관계를 의미한다. 순결을 처녀성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그렇고 조선 사대부가 연상되는 도덕주의자가 단지 '순결'이란 표현 때문에 맬서스의 주장에 반대하다니, 의아한 것이다.


반대를 위한 반대이거나 '편견은 천재의 눈도 가린다'며 맬서스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거울로 삼아 자기도 돌아본다는 저자의 고백처럼 정말 그 자신이 편견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부터해서 후불제 민주주의, 경제학 카페 그리고 국가란 무엇인가까지, 십 여 년 전 내가 그의 책을 탐독하며 열광할 때였다면, 맬서스의 인구론에 대한 이 글도 스폰지처럼 아무 이견 없이 쭉쭉 흡수 했을 것이다. 십 여 년이 흘렀다. 그 때 세상을 바라보던 시각과 지금이 같을 수 없다. 같아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복잡하고 어려운 세상 이치를 모른 채 이상향으로 쉽게 내달릴 수 있게 만드는 선악 이분법과 도덕주의는 문자 그대로 '청춘'의 나이 때나 전유할 수 있는 사고방식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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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맬서스의 인구론이 결과적으로 틀렸지만, 오늘날 환경 문제에 대해서는 정확히 빗댈 수 있다고 주장한다. 1인당 에너지 사용량과 배출량증가 속도가 기하급수적이라면, 꾸준히 증가하는 인구로 인해 지구의 생태계 재생 능력이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맬서스의 인구론이 편협한 근거에 바탕한 주장이라면, 맬서스의 인구론과 비슷한 환경 운동가의 미래 예측도 신뢰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른다. 맬서스가 기술 발전에 따른 노동 생산성 증가와 식량의 대량 생산을 예측하지 못하고 이를 간과해서 논지를 전개했듯이 현재의 환경론자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맬서스의 인구론에 빗댄다면, 자본 투자로 인한 기술 발전이 결국엔 환경 문제를 해결하리고 기대할 수 있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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