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주현 Dec 14. 2020

사과와 용서의 문제와 자기 중심

'대리효도'와 분리



'대리효도'라는 말이 있다. 자식으로서 평소에 미흡하게 했던 효도를 결혼해서 맞이하는 배우자가 대신 충족해 주기를 기대하고 요구하는 행태다. 대개 가족에게 무뚝뚝하고, 바깥일말 잘하면 되는 사람으로 인식되던 남자/아들에게서 발견되곤 했다. 나도 그랬다. 딸이지만 부모에게 대면대면 무뚝뚝했고 여러 면에서 욕심이 많아 배우자가 내가 했던 것 보다 훨씬 많이 내 부모에게 잘 하기를 바라고 은근히 요구했다. 내가 데리고 온 새 사람으로 인해 부모가 기분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함께 부모를 만나고 오면 상당히 피곤했다. 그의 부모는 물론이고 내 부모를 만나도 편하지 않았다. 그와 같이 있을 때 더 그랬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가 부모에게 어떻게 하는지 신경 써야 했던 것도 상당히 크다. 그가 부모에게 내가 잘 하지 못했던 부분을 채워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다 함께 있을 때 그를 예의주시하게 만들었고 또 부모의 반응에도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했다. 내가 채워지길 바라는 부분을 그가 채우도록 그에게 자연스럽게 요구하는 일도 정신적 에너지를 많이 써야 하는 피곤한 일이었다.


나는 이런 태도가 대리효도인 줄 몰랐고, 내가 나를 옭아매는 짓인줄도 알지 못했다. 내 족쇄에서 풀려난 건 나를 힘들게 만드는 이 기대와 요구를 놓아버려서가 아니라 그 또는 가족과 내가 분리되면서다. 아무리 그가 부모에게 잘한다 해도 그것은 오직 사위로서 사위 역할을 잘 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이 딸로서의 몫을 대신할 수는 없다. 딸로서의 효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뿐이다. 그가 부모에게 잘 하면, 좋은 사람이 되는 건 그이고 그의 도덕성이 훌륭한 것이지 내가 또는 내 것이 그렇게 될 수는 없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고 내 도덕성을 올리는 일은 딸로서, 며느리로서 오직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 분리는 자기 중심을 찾는 기초가 되었다. 여러 일에서 상대방에게 휘둘리지 않는 나를 발견한다. 옛날 사람처럼 며느리 앞에서 노골적으로 아들만 챙기고 편드는 엄니를 직관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그건 걍 엄니 마음 그릇 또는 사람 됨, 즉 엄니 (도덕성) 문제이지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다. 그 때문에 며느리 역할을 소홀히 한다면, 어쨌든 그건 내가 내 할 일을 다 하지 않는 것이고, 해를 입는 건 내 도덕성이다. 며느리로서 내 도덕성을 지켜줘야 할 사람은 엄니도, 아들도 아니다. 


일본에서는 상대가 받아주지 않아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인사하는 사람을 종종 봤다. 도쿄 지하철에서 나이 지긋한 아재가 내리려다 말고 좌석에 앉아 있는 청년에게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아는 사이는 아니고, 혼잡한 지하철 안에서 청년이 아재를 뭔가 배려했던 것 같다. 청년은 새침하게 팔짱끼고 스마트 폰만 보고 있었지만, 아재는 상관 하지 않았다. 어느 유적지에서는 아이들이 관리자 뒤통수에 대고 뭐라하면서 인사를 꾸벅하기도 했다. 분리가 일어나자 내게서도 비슷한 모습을 발견한다. 


한 번도 친근한 얘기나 정이라 할 만한 뭔가를 주고 받은 적 없는 탓에 경비 아저씨들과 나는 대면대면 퉁명스러운 사이이고, 또 아파트 현관 구조 상 나가고 들어갈 때 눈을 마주치지 못하기도 쉽다. 이전 같으면 아저씨가 나를 보지 못한 것 같으면 인사를 하지 않았다. 받아주지 않는 인사를 하면, 내가 바보가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인사를 하는 건 내 일이고, 인사를 받아주는 건 아저씨 일이다. 혹여 고의적으로 내 인사를 받지 않는 것이해도, 그건 그의 사람됨-도덕성 문제일 뿐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다. 그가 그런 사람이라고 해서 내가 인사를 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 탓이기 전에 내 태도의 문제가 된다.


사과와 용서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사과와 용서는 인사나 역할 노릇보다 주고 받기 합이 잘 맞을수록 바람직하지만, 서로의 필요조건은 아니다. 진심으로 사과해도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상대가 용서해도 그 용서를 거짓이거나 마지 못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계속해서 죄책감을 갖는 경우도 있다. 이때 사과와 용서는 더이상 상대방과 의 일이 아니다. 사과한 사람, 용서한 사람은 그것으로 자기 몫을 다 한 것이고, 그 이상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상대가 사과와 용서를 받아주기를 어느 정도 기다릴 수 있고 그래야 하지만, 한계가 있다. 그도 어쩔 수 없이 자기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과와 용서는 결국 자기가 자기 자신을 용서하고 보듬어야만 풀 수 있는 자기 매듭인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족 이기주의와 가족의 공공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