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감정, 그리고 자유
영화 <더 글래스 캐슬> 마지막 부분은 아버지를 원망하던 딸이 마침내 자기 어린 시절 아버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린 시절 부모에 대한 불만은 누구나 갖고 있는 감정이다. 나도 그랬고, 그 감정을 품고 있는 사람은 대부분 그것이 부족하고 못난 부모 슬하에서 지내야 했기 때문에 겪게 된 자기만의 문제인 듯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어린 시절 부모에 대한 원망과 불만은 인간 감정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지극히 당연한 감정이다.
이 감정은 누구나 갖는 것일 정도로 보편적이고 본능적이긴 하지만, 누구나 그 감정을 푸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의도해서 갖게 된 감정이 아니지만, 푸는 것은 부모를 이해하고 용서하려는 의도를 갖고 상당히 애써야 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일종의 알을 깨는 것과 같다. 평생 알 속에 갇혀 사는 사람이 있고, 알을 깨고 몸집을 불리는 사람이 있다. 알을 깨야만 몸집을 키울 수 있다는 건 곧 성숙을 의미한다. 스토리를 전부 보지는 않았지만, 이 영화 역시 그런 종류의 이야기를 담은 듯하다.
인상적인 건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풀게 된 계기다. 주인공 딸은 형제와 모여 간단한 식사를 한다. 언니와 남동생이다. 옆에 앉아서 아버지에 대한 자기 원망을 토로하는 누나 얘길 듣다가 동생은 음료수를 들며 무심하게 말한다. “그래도 아버지와 함께 했던 좋은 기억도 많잖아.” 동생의 이 한 마디에 주인공 딸의 얼굴이 가볍게 한 방 먹은 듯 미묘하게 변한다. 그 한 마디가 주인공 딸 머릿속에서 아빠와 함께 했던 좋은 추억, 아빠가 자기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던 여러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른다. 아빠에 대한 불만에 몰입되어 잊고 있던 기억이다. 그 시간들이 머릿속에서 되살아나자 그제서야 비로서 주인공은 아빠에 대한 원망에서 풀려난다.
누군가에 대한 감정은 사실 한 가지만 있을 수 없다. 누군가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다면, 그것은 그에 대한 여러 측면 가운데 내가 그 감정을 일으킬 만한 측면만 취사선택한 것이다. 돋보기를 다른 쪽으로 돌리면, 그 감정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다른 감정이 일어난다. 문제는 그 간단한 일이 좀처럼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원망 같은 좋지 않은 감정이 생기면 사실 가장 괴로운 건 자기 자신이다. 자연히 당사자는 그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발버둥 친다. 하지만 그럴수록 머릿속에서 자꾸 떠오르는 건 나를 원망에 휩싸이게 한 그 일, 그때 그 인간의 혐오스러운 모습이다. 그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갖도록 만든 사랑스러운 모습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 그에게 그런 모습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는다. 늪에서는 발버둥치면 칠수록 오히려 더 깊숙이 빠지는 것처럼.
108배를 300배씩 했다. 입으로는 감사와 사랑, 나무관세음보살을 부르지만, 잠깐잠깐 원망이 사라질 뿐 몸은 바닥에 붙였다 일어나기를 반복해도 머릿속은 금세 괘씸하고 비난하는 말들로 가득했다. 원망하고 미워하는 내 마음을 이해하자, 있는 그대로 지켜보자고 타이르기도 하지만, 그것도 그때 뿐이었다. 설거지할 때마다, 샤워할 때마다 혐오감이 일어났다.
오늘 불현듯 그의 사랑스러운 모습이 떠올랐다. 두 가지 요인이 있다. 한 가지는 '내가 마음을 풀어야 한다'는 강박을 놓은 것이다. 요가 덕이다. 절 운동 다음에 하는 태양예배 동작을 할 때면 언제나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고 다독인다. 뻣뻣한 근육이 이리저리 당겨지는 시원하지만 아픈 느낌, 그 느낌이 자연스럽게 불러내는 저항, 그럼에도 참고 동작을 완벽하게 하려는 욕심, 이 모든 마음과 의도가 휘몰아친다. 그때마다 주문을 건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 어차피 그 이상은 못한다.’ 동작을 잘 하려고 안 그래도 아픈 근육에 억지로 힘을 주면서 애쓰지 않고, 고통은 참을 수 있을 만큼만 참으면서 동작도 되는 만큼만 하다 보면 어느덧 몸이 풀리면서 만족스로운 자세가 된다.
동작을 하다 보니, 어느덧 또 생각이 그에게로 빠졌다. 그러나 평소와는 다른 방향이었다. '더 이상 그 애를 용서하고, 이 사건에서 내가 무언가를 배우거나 교훈을 얻으려는 그런 것들,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과 의도를 버리자. 내가 애 쓴다고 될 일이 아니다. 나는 할 수 있는 만큼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나머지는 흐르는 대로 어떻게 되겠지.'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마음을 고요하게 하니, 비로서 내 마음에 귀엽고 사랑스러운 느낌을 줬던 얼굴이 떠오른 것이다.
구체적인 사건도, 행동도 아니다. 그저 그 애가 웃고 있는 걸 내가 귀엽고 사랑스럽게 보던 느낌 뿐이다. 그 작은 느낌이 한 달 넘게 혐오스럽고 저열하게만 다가오던 그 애에 대한 인상을 순식간에 뒤바꿔 놓았다. 여전히 실망스럽고 서운한 그 애의 태도가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지만, 내 감정에 끼치는 영향력이 급격하게 작아졌다.
‘행동’과 ‘사람’에 대한 분리도 일어난다. 그 애가 취한 태도는 분명 잘못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라는 인간이 잘못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는 순수한 사람이다. 애정결핍에 따른 오만과 잘못된 판단이 잘못이다. 그 과오의 원인은 부처나 예수가 설파하듯 무지이지 인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주여, 저들을 용서 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때가 무르익은 것이다. 그에 대한 좋은 감정이 떠오른 건 이번 사건으로 생긴 온갖 부정적인 감정의 장벽이 하나하나 걷혀진 결과다. 보통 ‘시간이 약’이라고 말하는 그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특정 사건으로 촉발된 감정이 가라앉고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감정이 갖고 있는 에너지는 막강해서 대개 감정이 가라앉고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감정이 자극하는 일련의 생각에 휘둘려 일을 키운다. 이 일의 초기에 나도 그랬다.
시간을 갖고 기다려 보기로 한 뒤, 나는 끊임없이 떠오르는 기분 나쁜 생각들을 가만히 지켜 보아야만 했다. 나름대로 108배와 명상을 하고, 또 반성과 성찰을 시도하면서 조금이라도 빨리 그 감정의 장벽이 걷히기를 바랬고, 지쳐가고 있었다. 마침내 오늘 아침 그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와 그 일을 놓아버리고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그를 용서하고 그 일에서 교훈 찾기를 포기하자 기다리던 길이 트인 것이다.
마음이란 얼마나 다층적이며 교묘한가. 나는 나쁜 일이라 하더라도 사건 자체에 거부감을 갖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쁜 일이기 때문에 내 문제를 깨닫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긴다. 그걸 아는 마음은 이제 그 책임을 상황이나 남 탓으로 미루면서 회피하려고 하는 대신 이 일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얻어야 한다고 나를 다그친다. 무언가 목적을 갖고 그것에 집착하는 것이 마음의 특징이고, 어떤 종류의 문제든 대부분 이런 마음의 성질을 깨닫고 거기서 풀려나면 해결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바로 이 때문에 마음은 더 교묘하고 은밀하게 집착의 대상을 바꾼다.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신에게 맡길 수는 없었을까. 아직 나는 그럴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아직도 나는 애를 쓰고 끝내 기진맥진하고 나서야 놓아버릴 수 있다. 힘을 있는 대로 다 쓰는 그 티핑포인트까지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나는 그가 내게 보인 태도를 없었던 일로 만들 수는 없다. 그것은 분명 당사자가 수습하고 책임져야 할 일이다. 내 잘못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수습하고 책임지는 것은 내 일일 뿐 내 잘못으로 인해 그의 잘못이 상쇄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라는 인간에 대한 악감정은 사라졌다. 오히려 한 인간으로서 그를 응원하고 싶다. 자기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기를. 그 실수와 과오를 딛고 성숙한 사람으로 한 단계 성장하기를.
나는 과연 그 일을, 그를 용서한 것일까?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이제 나는 그에게서 풀려났다는 것이다. 자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