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돼, 다 괜찮아
친정 가족을 만나고 나면, 마음이 편치 않다. 처음엔 그저 소외되는 사람 없도록 신경 쓰느라 만나고 나면 몸만 피곤했다. 최근에는 한마음이기보다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동안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남는다. 이번 정권 들어서, 특히 조국 사태 이후 그렇다. ‘왜 저렇게 생각할까, 그 생각대로라면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쟤는 이런저런 사람이란 말인가’라는 식으로 당사자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 상대를 판단하기 시작했다. 그 판단은 그 사람됨에 대한 의심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주로 동생네를 상대로 정치적인 의견에 대한 대립에서 시작한 이 마음습관이 부모님을 상대로 다른 일상에서의 일에 대해서도 나타나고 있다. 아니, 부모님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이런 마음습관이 적용되는 것 같다.
어제는 3일 이상 친정에서 지내다가 돌아온 두 번째 날이었다. 지난달은 내가 3일씩 지내는 게 처음이라서 그런지 부모님이 나를 손님처럼 대해줬다. 이번엔 익숙해진 것 같다. 다시 식구가 됐다. 아빠의 식습관에 대한 잔소리가 견디기 어려웠다. 급기야 아빠가 말씀하시는데 뒤돌아서서 물을 마시며 아무 반응하지 않았다. 마치 아무것도 들리지 않은 듯 아니면 내가 대꾸할 만한 말이 아닌 듯. 속에서 너무 짜증이 나서, 만약 내가 반응을 한다면,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말고는 다른 그 무엇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주현이 너, 과자 먹는 거 고쳐야 돼. 안 돼”라는 말이 끝나고 내 뒤통수 언저리에서 맴돌던 시선의 느낌이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몸을 돌려 화장실로 발을 뗐다. 불과 세 걸음 밖에 되지 않는 화장실에 다다르자 잔소리에 대한 짜증으로 온 몸을 옭아매던 마음이 금세 걱정과 불안으로 둔갑했다. ‘아빠가 무시당하는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아빠가 가족에게서, 내게서 모멸 비슷한 느낌을 받고 상처 받을까봐 걱정되고, 또 미안했다. ‘왜 나는 “아직도” 이것밖에 되지 않을까.’ 먹는 것에 대해서 집착하고 잔소리하는 아빠도 마음에 안 들고, 나 자신은 더 싫다.
엄마는 확실히 나를 다시 가깝게 대한다. 엄마의 ‘가깝게’는 엄마 마음에 안 드는 거슬리는 면이 많아진다는 의미다. 지난달에 친정에서 지낼 때 입었던 똑같은 그 티셔츠가 이번엔 엄마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불과 한 달 전인데, 그때는 그 티셔츠의 낡음이 보이지 않았을 리 없다. 달라진 건 티셔츠가 아니라 엄마 마음이다. 그때는 내가 손님처럼 느껴졌다면, 지금은 옛날 출가 전 엄마 슬하의 딸이다. 엄마는 자기와 가까워질수록 그 사람을 점점 못마땅해 한다. 그걸 견디지 못하고 상대방에게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이래라저래라 거칠게 요구하기 시작한다. 가까우니까, 잘 아니까. 만만하게 대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엄마는 종종 불면증에 걸린다. 엄마 태도는 8할 이상 신체 컨디션이 좌우한다. 몸이 피곤하지 않으면 온화하고, 몸이 피곤하면 화를 낸다. 마트에 장보러 갔다 와서 피곤해하면서도 새벽에 깨서 다시 침대로 돌아오지 않더니, 다음 날 아침엔 내가 그 집에서 지내는 게 버거운 듯한 말을 했다. 잠이 오지 않아서 새벽에 갈비찜을 한 것이면서도 갈비찜 때문에 새벽부터 일어났다는 식으로 생색을 냈다(본래 음식 싸 주면서 내는 생색은 모든 엄마의 타당한 권리라고 생각한다. 시엄니의 생색은 엄청나다. 하지만 엄마는 본래 그런 걸로 생색내는 성격이 아니다). 그 말에는 엄마가 피곤한 게 내 탓이라는 원망이 섞여 있다. 커다란 갈비찜 통에서 작은 반찬 통으로 옮기기 위해 무거운 통을 들면서 애를 쓰고, 다른 반찬을 싸느라 애를 쓰고, 잠을 잘 자지 못한 엄마는 피곤하고 아마 저 깊은 곳에서 신경이 긁히는 느낌을 받고 있었을 것이다. 뜬금없이 말했다. “엄마가 더 늙으면 네가 반찬해서 엄마 갖다 줘야 돼.” 일반적으로 당연한 말이지만 엄마는 내게 그런 걸 딱히 바라는 스타일이 아니다. 몸이 피곤해서 네게 반찬 싸주는 게 지금 힘들고 거추장스럽다는 의미다. 그래도 딸이니까 싸줘야 한다는 의무감, 또 싸주기로 한 약속 때문에 다소 억지로 하고 있는 것이다.
기분이 좋지 않다. 친정에서 며칠 지내기로 하면, 3일째 되는 날부터 마찰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집에 돌아오면 찝찝하다. 이번엔 그 찝찝함이 더 질척하다. 아빠의 잔소리는 똑같았지만 나는 더 거슬렸고, 엄마는 식구들을 못마땅해 하는 예전의 그 모습으로 돌아갔다. 가족 사이 ‘아름다운 거리’ 유지를 또 다시 절감하고 다짐하지만, 그 경계 없음만의 문제는 아니다. 내 에고를 끊임없이 그리고 마구잡이로 자극하는 환경 속에서 너무도 속수무책으로 휘둘려 아빠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고 엄마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은 나 자신에 대한 불만이다. 친정에 있는 동안 나는, 엄마 아빠가 아침 산책을 하러 나간 사이 혼자 있을 때 명상한 1시간 남짓을 제외고하는 내내 한 순간도 ‘알아차림’하지 못했다. 엄마 아빠가 내 에고를 자극하면 자극하는 대로 온전히 날것 그대로 반응할 뿐이었다. 그런 나 자신이 한심하다. 집에 돌아와서도 그림자처럼 남아 있던 엄마 아빠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과 판단도 그 때문일 것이다. 엄빠를 나쁘게 판단하고 좋지 않은 감정을 갖는 그런 내가 더 싫다. ‘알아차림’을 조금이라도 했다면, 덜 그러지 않았을까? 지난 한 달 동안 하루에 최소 108배, 많게는 400배까지 하면서 나름 마음을 다스리려고 노력한 건 다 뭐란 말인가? 다 소용없는 짓인가?
모두 다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기도 좋다. 내 노력은 놓아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것저것 온갖 이상을 꽉 붙들어 매고 힘을 잔뜩 준 이기적인 욕심이었단 사실도 깨닫는다. 그렇지 않다면, 부모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과 생각, 그 기분 나쁜 생각이 아예 생기지 않는 상태를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욕심에 지나지 않는 목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부모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더 기분 나쁘게 느끼고, 그런 나 자신을 혐오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노력의 목적은 부정적인 생각이 나지 않는 게 아니라 부정적인 생각에 휘둘리지 않는 것인 것을 까맣게 잊고, 그런 생각과 나 자신에게 화를 있는 대로 내고 있었다.
중요한 건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는 것, 혐오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 부모에 대해서 비난하고 판단하며 싫어하는 생각, 그런 소위 나쁘다고 하는 생각은 거부하면서 소위 좋다고 하는 느낌만 받아들이고 허용하는 것이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조차 허물과 부족함을 혐오하고 거부하고 완벽한 모습만 인정한다면, 다른 누구의 불완전함을 포용할 수 있을까. 아빠의 심한 노인네 잔소리를, 엄마의 자기 자신과 타인을 존중하는 데 서툰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내가 나를 취사선택하면, 아무리 소중한 사람이라도 그를 취사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그에 대한 애틋함과 비난이 뒤섞인 애증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랑에 이르지 못한다. 그들의 견디기 힘든 태도를 견뎌내려면, 그들의 견디기 힘든 그 모습을 거부하는 나 자신부터 포용해야 한다. 엄마 아빠를 비난하는 나 자신에게 그래도 괜찮다고 타이를 수 있을 때, 아빠의 잔소리와 엄마의 변덕도 넉넉하게 받아줄 수 있는, 괜찮은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