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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주현 Feb 10. 2021

마음습관, 이기심이 나조차 위하는 마음이 될 수 이유


나는 어릴 때부터 동생을 참 좋아했다. 개구쟁이였던 동생의 익살맞은 표정과 장난스러운 몸짓은 정말 너무 귀여워서 그저 웃으면서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는 동생이 너무 귀여워서 그 볼을 매일 문지르고 입술을 갖다 대곤 했다. 귀여워서 동생을 좋아한 건지 좋아서 귀여워한 건지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질문과 같다. 동생은 그런 나를 너무나 귀찮아했지만, 내 그 짓은 남매로서 내외해야 할 시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됐다. 고등학생일 때 학교를 파하면서 친구들과 집에 왔는데, 동생이 집에 있기에 으레 하듯이 양손으로 동생 볼을 붙잡고 볼에 뽀뽀했더니 친구들이 깜놀했고, 그런 친구 반응에 나도 깜놀한 적도 있다. 동생이 결혼해서 한 여자의 남자가 되고 나서야 겨우 그쳤다. 동생은 더 이상 나만의 귀여운 동생이 아니고, 이제 남자로서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를 처음 만날 때, 나는 이 처럼 남자다운 남자는 없다고 생각했다. 조금 서운하고 아쉬웠다. 나는 귀여운 구석이 있는 남자를 좋아하는데, 이 남자는 너무 남자다워서 도무지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만난 지 3개월 만에 결혼했고, 신행에서 돌아와서 일주일이나 지났을까, 침대에서 일어나 까치머리를 하고는 주말을 어떻게 보낼까하며 그 춥고 좁은 거실 한 구석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데, 나는 그만 꺅~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그에게 달려들어 두 팔을 쭉 뻗었다. 양손 안에 가득 차오르는 그 볼의 말랑하고 보드라운 그 느낌이란. 갑작스러운 공격에 흠칫 놀라면서도 이내 그도 좋아라했다. 신혼의 단꿈이었다. 한 번 귀엽게 보이자 봇물 터지듯 그의 귀여움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그는 귀여웠고, 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 내 눈에 그는, 아기도 아니고, 아가가 되어 버렸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몸 구석구석에서 이렇게 귀여움이 뚝뚝 떨어지는 남자가 그때는 어떻게 세상 남자다운 마초 같은 남자로 보였을까. 콩깍지는 확실히 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자기에게 달려드는 나를 그때처럼 달가워하지 않는다. 달가워하기는커녕, 내가 다가가면 몸을 이리저리 피하고, 아예 내가 가까이 오지 못하게 발로 나를 밀어낸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부부이어서 이기도 하지만, 그런 반응은 내게 조금도 새롭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릴 때부터 동생에게서 봤던 모습이다. 귀여워서 달려드는 나를 지금 그처럼 동생 역시 팔로, 다리로 밀어젖혔다. 나는 나를 지긋지긋해 하는 그 모습도 귀여웠고, 지금도 귀엽다. 나를 밀어낼수록 나는 깔깔거리면서 달려들었고, 지금도 똑같다. 그 모든 게 다 귀여운 장난이(었)고, 나는 다 좋(았)다. 내 애정표현은 데자뷰다. 대상만 바뀌었을 뿐이다.


상대방을 귀엽게 보는 건 내 사랑 방식이다. 누군가가 귀엽게 보인다면, 나는 그에게 애정을 갖고 있는 것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조카들이 그러했고, 어느 순간 시조카도 그렇다. 연로한 나이로 이젠 힘이 빠져서이거나 내가 조금 철이 들어서이거나 그런 영향도 있겠지만, 몇 년 전부터는 부모님에게서도, 아이 비슷하게, 귀여운 구석을 발견한다. 그와 비슷한 면이 많아서인지 얼마 전부터는 그의 아버지에게서도 때때로 귀여운 느낌을 받는다. 물론, 조카들 빼고는 어릴 때 동생이나 지금 그에게서 자극받는 만지고 싶은 욕망은 없다. 그러나 어떤 대상이든 그에 대한 애정을 귀여운 느낌으로 치환하는 건 내 어떤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애정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내 마음습관인 것이다. 


대상이나 환경에 따라 생각이나 반응이 달라지기도 하지만, 거꾸로 인간은 대상이나 환경이 아무리 바뀌어도 똑같은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아마 전자보다 후자의 경우가 훨씬 많을 것이다. 어떤 현상이나 사건, 대상이나 환경을 인지하고 해석하는 틀이랄까, 뼈대랄까, 공식이랄까, 사람마다 자기 고유의 그런 어떤 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콤플렉스처럼 그런 틀이 도드라지면 잘 보이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쉽게 인식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난하다. 그리고 그 대상은 자기 자신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그 틀이 너무나 미묘하고 교묘해서 쉽게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대표적인 게 이기적인 태도다. 


대개 이기심을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만 위하는 마음이라고 정의하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도 위하지 못한다. 배려, 이해, 성실, 책임 이런 태도는 마음습관에 해당하고, 마음을 어떻게 내느냐, 어떤 마음을 내느냐 같은 것은 설명한 것처럼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습관이다. 자기 의지 이전에 자기도 모르게 툭 튀어나오고, 자기도 모르기 때문에 그 대상에 따라 다른 마음을 내기 어렵다. 자기를 위하고 배려하는데, 타인은 배려하지 않거나 못한다는 건 대개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의사를 간절히 꿈꾸는데 실력이 부족하자 부모의 조력 아래에서 부정한 방법으로 의대에 가고 수련 과정을 거치는 경우도 그렇다. 그렇게 해서 의사 면허를 받는다고 한들 그를 과연 의사라고 할 수 있는가. 기껏해야 의사 흉내를 낼 수 있을 뿐이다. 본인도 알고, 부모도 안다. 자기 꿈만을 이루기 위해 마땅한 다른 누군가의 기회를 빼앗는 이기적인 방법과 태도는 결국 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소외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만약 그가 진정 자기 자신을 배려하고 부모가 진정 자식을 위할 줄 안다면, 타인의 정당한 기회를 빼앗는 이기적이고 부정한 방법으로는 자기 자신을, 자식을 위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모를 수가 없다. 


이기심을 경계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태도가 중요한 건 결코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마음습관의 문제이고, 마음은 자기 자신과 타인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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