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운 느낌과 관용
오래 전에 인간은 아기를 보았을 때 왜 귀여운 느낌을 갖는지에 대한 기사를 본 적 있다. 아기뿐만 아니라 동물 새끼도 귀엽게 보는데, 아기나 동물 새끼의 특징은 얼굴과 머리가 몸통 크기의 반만 하고 팔 다리가 짧으며 동글동글한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기나 새끼이기 때문에 귀여운 느낌을 갖는 게 아니라 인간이 귀엽다고 느끼는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아기나 동물을 귀여워하는 것이라고 한다. 아기가 그렇게 생긴 건 인간으로 하여금 귀여움을 느끼게 해서 자신을 보호하고 지켜주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내용이었던 듯하다.
충분한 내용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 아기나 동물 새끼를 좋아하는 건 그 천진난만함과 귀여움 때문이다. 아기나 동물 새끼를 보면, 대개 얼굴 근육의 긴장이 풀리고 저절로 미소를 짓게 되는데, 그런 현상은 귀여운 인상이 자극한 내 안의 어떤 느낌 작용의 결과다. 그러는 동안 인간은 아기나 어린 아이에게 오픈 마인드가 된다. 가슴이 완전히 열리는 것이다.
오픈 마인드 또는 가슴이 열리는 것은 어떤 상태일까. 가슴을 열라는 말은 너무 자주 들어서 식상할 정도인데, 그 탓에 나는 그 상태가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인지 잘 모르고 지냈다. 문득 인간이 보통 아기 또는 아주 어린 아이에게 대할 때만큼 가슴을 활짝 여는 때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아기나 걸음마를 뗀 아이를 볼 때, 어떠한가. 그만큼 자애롭고 넉넉한 마음을 갖는 때가 없다.
아기나 걸음마를 막 뗀 아이는 ‘잘’하는 일이 그야말로 하나도 없다. 잘하는 일은커녕 뭔가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조차 거의 없다. 배고프고 어딘가 불편할 때 열심히 우는 일, 그 일만 잘하면 사람들은 만족한다. 그리고 설사 잘 울지 않아서, 고작 우는 일조차 잘 못해서 문제가 생겨도 아이에게 화내고 아이를 탓하지 않는다. 조금 커서 걸음마를 뗀 아이에게도 비슷하다. 조금 걸을 줄 알게 됐다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온 집안을 헤집어놓고 별의 별 짓을 다 저질러 놓아도 우리는 아이를 탓하지 않는다. 화를 내도 혼자 내는 것에서 그칠 뿐 아이에게 수습하라고 하지 않는다. 혼을 내도 시늉에 가깝다. 그 때 아이가 살짝 한 번 웃기라도 하면 또 어떠한가. 아무리 머리끝까지 화가 났어도 한 순간 다 무너지고 만다. 아이에게 우리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모든 것을 허용한다.
그러나 아기 머리가 점차 작아지고 팔다리가 길어지면서 아이를 향해 열려 있던 가슴도 차츰 닫힌다. 점점 요구하는 것이 많아지고, 금기시하는 것도 많아진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잘 누워서 숨만 쉬고 있기만 하면 됐던 때와 달리 이런저런 선을 그어놓고 그 선을 넘지 말거나 또는 그 선에 다다를 것을 요구한다. 허용하지 않는 것이 많아진다. 아이는 둘째 치고,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활짝 열려 있던 가슴이 닫힌다. 가슴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 허용하지 않는 것, 거부하는 것이 많아지면서 점점 닫히는 것이다. 그리곤 가끔 다른 아기나 아이를 볼 때만 잠깐 다시 가슴이 열린다. 아기는 그저 약한 생명이기 때문에 보호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닫혀있는 가슴을 활짝 열어주기 때문에 귀한 존재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고 한다. 사랑을 마치 감정인 듯 여기는 건 애틋한 느낌, 소중하다는 생각이 불러일으키는 느낌 같은 것들 때문일 것이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상태이고, 상태로서의 사랑이라면 진정한 사랑은 바로 아기나 걸음마를 땐 아이를 대하는 태도가 아닐까 한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모든 것을 허용하는 것이다. 심지어 아이가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는 그런 잘못을 저질러도 우리는 아이를 너그럽게 감싸주지 않는가. 그런 점에서 사랑은 가슴을/마음을 여는 것이고, 그것은 한 마디로 자기 자신과 타인(사적인 관계로서의)의 잘못 또는 부족함 따위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하는 것, 즉 관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