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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주현 Apr 05. 2021

'나'를 위한 가족 vs. 가족을 위한 '나'

박수홍 논란, 한국인의 '착한 사람' 콤플렉스 또는 강박증에 대한 반성

박수홍 재산을 모두 횡령해 간 매니저가 친형이라는 사실이 처음엔 말도 안 되는 뜬소문으로 치부할 정도로 믿기지 않았다. 그 충격이 이 사건에 대한 관심을 날이 갈수록 뜨겁게 만드는 듯하다. 행방이 묘연한 그 형을 찾기 위해 네티즌 수사대가 활동하기 시작했다. 수홍이 덕에 사는데 돈이 많이 벌린다고 해서 우리(형 가족)가 어케 호위호식하겠냐며 유난히 검소한 모습을 보이고 다녔다는 형과 형수의 위선 얘기도 들리고, 무엇보다 더이상 박수홍의 소득과 재산을 횡령할 수 없게 될까봐 동생의 결혼도 적극적으로 반대했다는 소문은 경악스럽다. 


이쯤 되자 박수홍은 논란의 여지 없이 완벽하게 가련한 피해자가 되었다. 게다가 평소 박수홍은 유재석 버금가는 바른생활맨 이미지를 갖고 있었고, 극진한 효자 이미지는 유재석도 갖지 못한 것이었다. 박수홍은 대중에게 그야말로 도덕군자다. 이런 아무 흠결 없이 완벽하게 희고 깨끗한 도덕군자가 더욱이 친형에게 사기 배신을 당하다니, 이보다 더 완벽한 조건/정당성을 갖는 피해자가 없는 것이다.


나도 처음엔 그저 너무 마음 아프고 안타까운 사연이라고만 생각하면서 박수홍과 그 부모를 동정했다. 그 부모 속이 어떨까. 가족, 특히 유난히 끈끈하고 돈독한 가족애를 자랑했던 터라 아마 돈이 문제 아닐 것이다. 그토록 믿었던 형에 대해서 당사자가 느낄 배신감도 엄청날 테고, 사실 그보다 더 괴로운 사람은 그 부모 아니겠는가.


하지만 세상에 한 손으로 낼 수 있는 박수 소리가 있는가. 부모와 형 가족의 반대를 이유로 간절히 결혼하기를 바랬던 여자와 헤어졌다는 대목은 이 사건에 대해서 당사자가 감수해야 할 책임의 몫을 환기시킨다. 제3자와 같은 한국 대중(집단, 특히 도덕주의적인)이 보기엔 결혼 같은 인륜지대사에서 자기 뜻을 굽히고 부모와 다른 가족 뜻을 따른 '착한' 아들이자 동생으로서 '바르게'만 보이겠지만, 결혼 상대였던 여자(개인)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줏대 없는 남자,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일에 자신 없어 하는 사람, 하나의 오롯한 성인 남자가 아니라 여전히 그저 '아들'이고 '동생'일 뿐인 사람이다. 그 가족을 떠나 새로운 하나의 가족을 꾸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 


헤어질 당시엔 상대 여성 역시 당사자만큼 힘들고 괴로웠겠지만, 아마 조금 지나고 나서부터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결혼처럼 자기 삶에서 중요한 일에 대해서 그토록 자기 중심(확신과 책임질 각오)이 없다면, 설사 모든 가족의 열렬한 환영 속에서 결혼한다고 하더라도 그 결혼 생활(더구나 한국에서의)은 다른 여자들이 겪는 시댁과의 갈등과 어려움보다 두 배, 세 배 이상으로 힘들었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게 마음처럼 쉽지 않단 걸 한녀는 조금만 나이 먹으면 알게 된다.


함부로 말할 수 없지만, 박수홍과 그 부모, 그리고 대중이 돌아보아야 할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박수홍이 잘못한 건 형과 형수를 지나치게 믿은 마음에 있지 않다. 당사자와 그 가족 뿐만 아니라 그를 지켜보는 대중은 그 믿음을 후회할 게 아니라 그 믿음을 빌미로 자기 일에 대한 책임을 다 하지 않은 것, 금전/재무 관련한 검토와 처리 등을 복잡하고 골치 아프다는 (또는 혹여 조선 선비처럼 돈은 더러운 것이라는 관념에 따른) 이유로 형에게 다 미뤄버린 것은 아닌지 솔직하게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지금 일은 지난 수십년 동안 골치 아프고 자칫 계산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일에 전혀 신겨 쓰지 않고 고고한 듯 거리를 둔 채 딱 방송일만 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한 댓가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가족에게서 독립하는 일이다. 당연히 여기서 독립은 경제적 의미가 아니다. 정신적 독립이다. 더이상 (어느 방송에서 스스로 말했듯) 가족을 위해서 일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일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태도를 갖는 것이다. 이 여자다 싶은 이성이 있어도 부모가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서 포기하고, 그 이성과 헤어진 원인을 부모의 반대라고 여기는 태도는 자기 삶에 대한 책임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부모에게 일부 지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사람에게 자기 삶이라는 게 어떻게 있겠는가. 그는 그가 아니라 그 부모와 한 덩어리인 상태인 것이다. 


만약 그때 엄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기 소신대로, 자기 삶을 자기가 책임지겠다는 마음으로 결혼했다면, 설사 결국 그 상대와 헤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적어도 사건이 이토록 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토록 가슴이 찢어지는 배신감에 고통스러운 일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형을 용서하지는 못할 망정, 그에 대한 원망에서 자유로워지고 비로서 자기 자신으로서 우뚝 서 진정한 자기 삶을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러한 반성 속에 있지 않을까. 그렇게 할 때 아마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부모도 자식에게서 자유로운 진짜 행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신은 인간에게 선물을 줄 때 그것을 고난과 고통이라는 포장지로 싸서 보낸다는 말이 있다. 그 때문에 인간은 신의 선물을 알아보지 못한다. 박수홍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실하고 신실한 그에게 신이 왜 무엇을 위해 이런 가슴 찢어지는 고통을 안겨줬을까. 어떤 사건이든 관련한 사람은 그 일에 대해서 각자 자기 몫이 있다. 사기와 배신에 대한 사과와 반성은 형과 형수의 몫이다. 박수홍과 그를 지켜보는 대중의 몫은 무력한 피해의식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는 것이고, 그 길은 오직 이 방법이다. 사랑하는 가족 안에서 성인이 다 되도록 정신적 분리를 거부했던 내 모습을 반성하고 깨달아 '나'로 바로 서는 것이다. 





feat. 환장할 우리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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