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주현 May 09. 2023

자연의 탐욕

자기 목적을 위해 특정 대상을 교묘히 이용하는 사고방식

흔히 인간의 지나친 욕심 또는 이윤 추구라는 자본의 속성을 비판적으로 지적하기 위해 자연과 비교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인간과 자본은 배가 이미 부른데도 불구하고 당장 먹지 않을(먹을 수 없는) 잉여분을 쌓아두기 위해 빈곤한 사람이나 단체 등의 몫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음식을 차지하려 하는 반면, 자연은 잉여 자원을 쌓으려 하지 않고 당장의 자기 필요에 만족함으로써 여럿이 다 함께 살아갈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과연 자연에는 정말 탐욕이 없는가? 


길에서 떨어진 먹이를 먹으려고 모여드는 비둘기는 과연 모두가 서로 사이좋게 먹이를 나눠 먹는가? 그렇지 않다. 종종 덩치 크거나 아니면 기 쎈 비둘기 중에는 먹이를 감지하고 어디선가 날아 온 다른 비둘기를 내쫓기도 한다. 쫓겨난 비둘기가 한 두 발치에서 기회를 엿보다가 다가가면 또 다시 날개를 펼치고 부리를 들이밀며 그 비둘기를 쫓아낸다. 쫓아내는 비둘기 덩치가 토실토실 아무리 커도 나눠먹자고 다가오는 그 비둘기 사정-깡 말랐든 아니든-을 조금도 상관하지 않는다. 


배부른 사자는 다른 동물을 해치지 않지만, 배가 고프면 자기가 먹이를 충분히 다 먹을 때까지 다른 동물과 나누지 않는다. 피 냄새를 맡고 모여들 하이에나를 고려해서 그것들이 제각기 충분히 먹을 만큼 남겨두지도 않는다. 당장 먹지 않을 먹이를 저장해두기 위해 다른 동물이 자신이 다 먹고 남은 것 먹는 걸 막지는 않지만, 적어도 자기 배가 다 찰 때까지 그래서 더 먹을 수 없을 때까지는 먹이를 나누지 않는다. 


비둘기와 사자가 먹이를 저장하지 않는 것이 욕심이 없어서 그래서 다른 생명체와 먹이를 나누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는 한계 때문이라면, 적당히 먹지 않고 자기 배가 다 찰 때까지 그래서 더 먹을 수 없을 때까지는 먹이를 나누지 않는 습성 역시 지나친 욕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식물은 탐욕 없이 다른 식물을 배려하면서 함께 자라나? 그렇지 않다. 식물이 뿌리를 내리면서 그리고 햇빛을 더 받기 위해서 얼마나 치열하게 주변 식물과 경쟁하는 지는 식물에 대해서 약간의 관심만 갖고 있어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뿌리를 충분히 내리고 적당히 햇빛을 받는 위치에 있으면 내 옆에서 자리 잡으려고 하는 식물에게 땅속 영양분과 햇빛을 기꺼이 나눌 만도 한데, 식물에게는 그런 배려심이 없다. 바로 옆에서 어떤 식물이 튼튼하게 자란다면, 그건 그 식물이 옆 식물과의 경쟁에서 지지 않을 만큼 튼튼하고 강해서이지 배려나 양보 덕이 아니다. 하늘에서 무한히 내리쬐는 햇볕을 공평하게 받기 위해 함께 있는 식물들이 서로 비슷한 높이로 자랄 만도 한데, 강하고 튼튼한 식물은 자기가 더 많은 햇볕을 받겠다고 기어코 키를 높이 키워서 자신보다 약하고 작은 식물을 죽이고야 만다. 이런 모습은 지나친 욕심이 아닌가?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 그리고 그 능력에 따라 잉여 자원을 ‘더 많이’ 쌓아두려고 하는 그 ‘탐욕’스러운 행동방식 덕에 오히려 인간 역사에서 빈곤이 감소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탐욕이란 단어가 만들어진(또는 이토록 흔히 사용된) 건 자본주의 단점을 보완해서 발전시키려는 게 아니라 아예 무너뜨리려는 반체제 좌파의 영향 탓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갖는다. 자본주의와 관련한 인간 속성을 비판하기 위해 언뜻 그와 달라보이는 대상을 추켜 세우면서 비교하는 방식은 좌파의 다양한 주장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특히, 자연처럼, 그런 대상들은 비판하고자 하는 것에 비해 수동적이고 그래서 피해를 입은 것처럼 보인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나인홀트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2장을 읽으면서다. 대공황 등으로 전례 없는 번영을 가져온 자본주의에 대한 믿음에 충격적 균열이 생긴 시대에 쓰여진 이 책은 진보 지식인이라는 코넬 웨스트의 설명처럼 “민주적 사회주의에 대해서 기독교적으로 옹호”하기 위해 “마르크스적으로” 사회 구조를 분석한다. 나는 마르크스적 구조 분석에 대해서 아는 바 없는 데도, 니버가 과거 백인의 제국주의 근원으로 자기 의식(다른 사람 및 환경과 관련시켜 바라봄으로써 자기를 의식하게 되는 인지 현상)과 그로 인한 에고적 자기 초월성을 들면서 소설가 왈도 프랭크의 글을 인용한 부분에서 그의 좌파적 사고방식을 감지했다. 물론, 그 직전에 자기 의식의 자기 보존 충동이 “세력 강화에 대한 욕구로 쉽게 전환”된다고 하면서 인간(백인)의 한계를 지적하기 위해 동물의 자기 보존 본능과 비교하기도 한다.


제국주의 백인을 비판하기 위해 왈도 프랭크는 백인과 인디언 같은 토착 부족을 비교하면서 인디언을 자연에 포함시키고, 이성의 산물인 인간의 자기 의식과 그로 인한 에고적 자기 초월성을 설명하는 니버는 왈도 프랭크 의견에 동의하면서 자연인 인디언의 자기 의식을 "무한성에 흡수되려는" 종교적 욕구로 추켜 세운다. 하지만 인디언의 자기 의식이 가진 자기 보존 충동 역시 세력 강화에 대한 욕구로 전환되기는 마찬가지다. 부족 간 침략과 세력 확장 등이다. "광대한 바다를 건너 항해할 수" 없었던 인디언의 부족 간 전쟁은 그 영토 안에서 이루어진 제국주의적 다툼과 다를 바 없었다. 그렇다면, 그들 역시 백인과 하등 다를 바 없이 이성과 탐욕을 가진 평범한 인간이다. 니버나 왈도의 자연 또는 인디언에 대한 인식은 언뜻 추켜 세우거나 비호하는 것 같지만, 실은 선을 긋고 자신들은 그것들과 다른 종류의 인간 또는 사회라는 전제를 내포하면서 자연이나 피지배자를 무력하고 순결한 희생자 취급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주장은 일본 좌파의 과거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도 예외 아니다. 오구라 기조가 <한국의 행동원리>에서 지적하는 바가 그것이다. 일본 좌파는 자기 반성을 통한 일본의 발전이란 목적을 위해 조선(대한제국?)을 무력한 희생자로 만듦으로써 한국을 이용하려고만 하고, 그로 인해(물론, 그것만이 원인은 아니지만) 한일 관계는 개선되기는커녕, 점점 희망을 가질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기만 한다는 것이다. 


니버는 이기적 충동의 은밀함과 교묘함을 설명하면서, 경제적 자기 추구(이기심)를 공동 선에 포함시켜 “가장 포괄적인 사회적 목적으로 전환”시킨 19세기 공리주의 운동은 신흥 중산층에게 이윤 추구의 도덕적 정당화를 제공했을 뿐이라며 이기심을 경계하는데, 이런 식의 주장 역시 이기적 충동의 그 은밀함과 정교함의 한 일례이며 평등에 부합하지 않는 오만한 사고방식으로 보인다.





매거진의 이전글 부자와 자존감의 상관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