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주현 May 11. 2023

니버와 하이에크

개인의 겸손은 사회의 자유로 드러난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다시 꺼냈다. 몇 해 전에 중간까지 읽다가 덮었는데, 이번에도 2장까지 읽고 나니 더 쥐고 있어야 하나 말아야 하는 고민이 들었다. 내용 자체가 어렵다기보다, 근 백 년 전에 쓴 표현이어서 그런지 이해하는 데 애가 많이 든다. 게다가 1930년대라는 시대적 맥락이 중요한 책이어서 지금 굳이 이 책에 매달려야 하는 의심이 더 들었다. 특히, 니버의 초기 저작이었던 이 책 뿐만 아니라 이후 주장까지 요약 설명한 두 현대 학자의 서문으로 갈음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니버의 제자인 길키는 이 책의 논지에 더해 이 책을 쓴 10년 후 저작인 <인간 본성과 운명>까지 니버를 입체적으로 안내한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 초월 능력으로 사회가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도덕적일 수 있고, 피조물로서의 한계로 인한 고통 또한 극복할 수 있다. 상대성과 유한성이라는 한계 때문에 도덕적 의지나 객관적 판단에 근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러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의 자기 초월 능력은 한편, 피물조물적 존재로서의 의존성과 연약함, 유한성으로 인한 불안에 대항해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에고적 창조력에 활용되기도 한다. 이는 이기적(자기중심적) 행동으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인간 세계(나, 우리)의 가치가 궁극적이며 절대적이라는 교만을 야기한다. 개개인으로서는 보잘 것 없는 인간은 자기 오만을 공동체에 투사하는 방식으로 드러내기 때문에 선량한 사람도 공동체를 통해 죄를 저지르는 일이 생긴다. 죄와 불의의 원천은 인간의 교만인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교만의 원천인 자기중심성을 자각할 수도(무지), 받아들이지도(기만) 못한다. 또, 이기심으로 포장한 애국을 칭송하는 분위기에서 이기심 고백은 공동체 가치 부정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불의에 뒤따르는 양심과 죄의식 덕에 인간은 죄의 책임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안다. 따라서 이에 대한 극복은 신앙과 영성에 달려 있으며, 이기심 고백은 자기 죄의식을 넘어서는 최고의 영적 자기 초월 행위이다. 역설적으로 자기 죄 인정과 회개가 가장 도덕적인 태도인 것이다.


역사는 역동적이고 창조적이며 진보적이지만, 이는 자유주의 주장처럼 악에 대한 선의 점진적 승리가 아니다. 인간은 모두 죄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의 진보는 성경의 십자가 사건이 은유하는 것처럼 오직 인간 존재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태도(신의 은총)에 달려 있다.




인간 이성의 불완전성 지적은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도 줄곧 강조하는 부분이다. 정의 구현을 위해 기득권(통치 집단)에 대한 비폭력적 강제를 주장하는 니버의 근거는 이성이 이기적 충동만큼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성을 신뢰하고 사회 개선 수단으로 삼을 수 있었던 건 이성에 편견과 사리사욕이 없기 때문이었는데, 세계 대전처럼 위기 상황에서는 오히려 집단 이기주의를 정당화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기득권(통치 집단)에 대한 비폭력적 강제는 현실적으로 오직 법치로 구현된다. 니버가 이 책에서 법치를 정의 구현의 유일한 수단이라고 제시했는지 (다 읽지 않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또 다른 서문의 저자 코넬 웨스트가 인용한 "정치인의 현실 감각은 도덕적 선지자의 어리석음의 도움을 빌리지 않는다면 정말로 어리석게 되고 말 것”라는 주장의 의미가 모호한데, 어쨌든 니버의 말년 저작에 의하면 불의 극복의 유일한 방법이 자신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라고 결론 짓는 듯하다.


이러한 논지는 결국 하이에크의 주장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인간 본성과 운명>, <노예의 길> 둘 다 1940년대 초반 저작이어서 그런 것일까? 하이에크가 자유를 강조하는 건 그 역시 이성의 불완전성, 즉 무지가 인간의 근원적 결함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살인과 억압 수단인 속임수, 폭력을 제외한 나머지 일에 함부로 개입하거나 관여하는 태도가 노예의 길이 되는 건 니버도 지적한 인간의 의존성과 상대성, 유한성 때문인 것이다.


니버 역시 "자유가 있는 곳에 죄가 있다"고도 했다. 인간의 불안은 자신의 나약함과 더불어 자유의 상태에 놓여 있는 데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자기 초월 능력의 창조성이 그에 대한 방어에 사용되면서 교만을, 그리고 교만이 폭력과 파괴를 낳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의 해결 방법으로 니버는 자유의 제한이 아니라 겸손이 유일하다고 말한다. 이는 결국 자유로 드러난다. 자기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나 아닌 다른 일에 함부로 개입하거나 관여하기 어렵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역사가 악에 대한 선의 승리라는 관점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니버 사상은 자유주의가 아니지만, 길키는 니버 사상을 인간 세상의 상대성과 역사의 진보적 변화를 긍정한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적이라고 해석한다. 인간의 불완전성 강조는 겸손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겸손은 자유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니버와 하이에크의 주장은 이미 같은 선상에 있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자연의 탐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