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미주신경이론과 사회적 저신뢰
혼잡한 지하철에서 다리 꼬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화가 났다. 지하철은 자기 집 안방이 아니다. 자리를 맡아 앉았다고 해서 자기 편할 대로 해서는 안 된다. 주변을 고려해야 한다. 빈자리가 널널한 상태가 아닌, 혼잡할 대로 혼잡한 상황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있으면 그만큼 서 있는 사람 자리를 차지한다. 그 앞에 선 사람은 꼰 다리에 부딪히지 않게 서기 위해 더 안감힘을 써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말하지 못했다. 당사자에게 양해를 구하지 못한 채, 집에 돌아와서 이곳 페북 같은 SNS에 그런 개념 없는 태도를 힐난했다. 꼰 다리를 풀어달라고 요구하면, 왠지 공격적인 반응으로 되돌아올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불과 5년 전에도 그랬다.
지금은 화나지 않는다. 불편하긴 하지만, 그를 비난하는 마음은 들지 않는다. 잘 몰라서 그런 거겠지, 아니면 입장 바낀 경우에도 본인은 그다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해서 그런 거겠지,란 생각이 든다. 만약 자신이 꼰 다리가 그 앞에 선 사람에게 불편을 끼친다는 걸 알면, 즉각 꼰 다리를 풀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연로하거나 어린 아이 또는 힘겨워 보이는 사람이 보이면 즉각 일어나 자리를 양보하는 모습을 곧잘 목격하는데, 그까짓 꼰 다리 푸는 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다리 풀어달라는 부탁을 거절하겠는가? 나는 한국인만큼 상대방에게 피해주지 않으려고 나름 애쓰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다. 팽배한 도덕주의 영향으로 때론 지나치게 눈치를 볼 정도로 한국인은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나름대로 애쓴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지금은 영 불편하면 꼰 다리를 풀어달라고 웃으면서 가볍게 요구할 수 있다. 두렵지 않다.
내가 이렇게 변한 건 무엇 덕일까? 나는 그저 사고방식 또는 세상 보는 눈이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이를 들면 마음이 넉넉해진다는 그런 식이랄까? 임상의이자 상담가인 뎁 다나의 <다미주신경 이론>을 읽으면서 그런 내 변화가 단지 사고방식이나 세계관 또는 인간관이 달라져서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것은 사고방식의 주축을 이룬다고 여겨지는 뇌의 작업 결과가 아니라 '몸'에서 일어난 변화 때문이다. 자율신경계의 변화다.
다미주신경 이론은 '90년대에 정신의학자 스티븐 포지스가 제창했다. 그는 연구를 통해 삶과 세상 보는 방식을 결정하는 곳이 뇌 아닌 자율신경계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배쪽 미주신경, 교감신경, 등쪽 미주신경이 그 핵심이다. 이런 자율신경은 기원전 몇 천년 전에 등쪽 미주신경부터 시작해, 교감신경, 배쪽 미주신경 순으로 발달했다. 횡경막 아래쪽에 장기에 분포해 소화 등의 기능을 하는 등쪽 미주신경은 "단절이나 작동 중지 또는 붕괴"적 태도와 관련 있고, 교감신경은 "자원 동원 또는 투쟁-도피"와, 횡경막 위쪽인 폐와 심장에 주로 분포한 배쪽 미주신경은 "안전이나 연결 또는 조절"을 관할한다. 쉽게 말해 등쪽 미주신경은 일종의 번아웃 상태를 유발하게 하고, 교감신경은 익히 알려져 있듯이 위험/위협에 도망칠 수 있도록 각성시키는, 거꾸로 활력있는 생활을 가능하게 하며, 배쪽 미주신경은 안전감과 평온한 느낌을 통해 타인과 유대, 연결, 협력을 가능하게 한다. 흔히 말하는 마음의 문 또는 가슴을 연다는 건 말 그대로 가슴에 주로 분포한 배쪽 미주신경의 활성화 영향이다.
다미주신경은 당연히 뇌와 연결되어 있다. 뇌간에서 몸으로 퍼져 있지만, 정보를 주고 받는 양은 뇌보다 자율신경계가 주도한다. 신경계가 뇌에 정보를 주는 양이 80%이고, 뇌가 신경계에 전달하는 건 20%에 지나지 않다. 사실상 외부 환경에 대한 판단은 자율신경계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결정하는 것이다.
<다미주신경 이론>은 그 원리보다 원리가 보다 실용적인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즉, 자율신경계를 조절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이는 놀라운 사실이다. 자율신경계는 인간이 의식적으로 조절할 수 없는 무의식 영역이라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 과학은 이제 무의식까지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수준에 이르렀단 의미 같아 경이롭다.
사실 책이 제안하는 방법은 아직 잘 와 닿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 이 책 역시 호흡을 강조한다는 사실에서 나와 접점을 찾을 수 있었다. 호흡을 주시하면서 관찰하는 건 내가 매일 하려고 노력하는 명상의 기초이고, 몸 전체 감각을 호오 반응 없이 객관적으로 관찰함으로써 마음의 힘을 기르려는 건 머리가 아니라 몸에 삶의 열쇠가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다미주신경이론이 밝혀주고 있기 때문이다.
지하철에서 다리 꼬고 앉는 사람에 대한 조금은 넉넉해진 내 관점은 아마도 지난 5년간 지속해 온 명상이 내 배쪽 미주신경을 활성화시킨 덕인 듯하다.
이같은 사실은 유독 낮은 한국의 저신뢰의 원인이 그저 역사적 또는 사회적 배경 탓만은 아닐지 모른다는 추측을 낳는다. 한국의 저신뢰 요인으로 지목되는 한국의 과거 부정부패가 고성장 정책에서 불거진 폐해라고 하지만, 부정부패로만 따지면 사실 사회주의 국가를 비롯한 저개발국가가 훨씬 심하고, 한국은 많이 개선된 반면, 그런 국가는 여전히 차도가 없다. 한국이 독보적인 고성장은 그나마 그런 고성장을 정책적으로 설계한 정치권력의 부정부패가 절제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이미 세계 경제학계에서 인정한 바이다.
배쪽 미주신경은 급박하게 생존에만 목숨 걸어야 했던 원시사회를 벗어난 뒤에야 발달했다. 그 역할은 등쪽 미주신경과 교감신경 작동의 브레이크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각자도생보다 협력이 생존에 더 유리해진 시기에 발달했다. 협력하려면 우선 내가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아야 하고, 그로써 타인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기에 배쪽 미주신경이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저신뢰는 한국인 각자의 자율신경계에서 배쪽 미주신경이 아직 충분히 활성화되지 않은 탓도 꽤 크지 않을까? 지난 우한코로나 사태 때, 서구에 비해 유독 감염에 겁을 내며 몸을 사리고 타인의 마스크 착용 여부에 쌍심지를 켜고 감시했던 반응 역시 교감신경에 대한 배쪽 미주신경의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은 영향 아닐까 싶은 것이다.
세상은 안전하다, 과거보다 훨씬 안전하고 풍요로워졌다고 온갖 자료를 들어 증명해도, 배쪽 미주신경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으면, 소 귀에 경 읽기에 지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증명하고 설명하는 일도 가치 있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하고 실질적인 건 각자의 배쪽 미주신경을 활성화하도록 독려하는 일인 듯하다. 설득은 기실 상대방의 배쪽 미주신경을 활성화시키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