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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주현 Jun 21. 2023

킬러 문항 논란과 '드라마'라는 대학 입시 과목

목적이 다르다

중2 아들을 쿠알라룸푸르에 있는 국제학교로 전학시킨 친구는 얼마 전 대학입학시험 과목을 선택하면서 고민했다. 영국의 대입 일정을 따르기 때문에 중3 가을학기부터 시작하는 입시 준비를 시작하면서, 여러 과목 가운데 자신에게 유리한 과목 몇 개를 선택하는 방식인 듯 어떤 어떤 과목을 선택했는데 바꿀까 말까했다. 그 가운데 '드라마'라는 과목이 있었다. 아들이 그 과목을 좋아하는데, 엄마인 자기가 봤을 때 연기를 잘 하지 못하는 것 같아 다른 과목을 선택했다가 다시 드라마로 바꿨다.



셰익스피어 같은 고전극에서부터 창작극까지 하나의 연극을 위해 각자 역할을 맡아 평가 받는 방식의 과목은 한국인인 나와 다른 친구에게 너무나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나는, 부러웠다. 꽤 오래 전부터 막연히 나도 극 연기를 한 번 해보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지만, 좀처럼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연기를 배워보고 싶은 건 연기가 나 자신을 조금 더 입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하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모든 예술 분야는 자기 표현이다. 고흐 같은 유명 화가 작품을 똑같이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그림을 잘 그려도, 모사가가 화가(작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건 그 그림에 그리는 사람이 표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노래도, 글도, 춤도 다 마찬가지다. 연기 또한 비단 캐릭터를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게 아니라 캐릭터를 연기자 자신이라는 필터를 거쳐 표현하는 일이다. 더욱이 자기와 다른 캐릭터의 상황과 성격을 자기화해야 하는 임무를 맡게 되면서 평소 생활로는 발견하기 어려운 자기 자신의 다양한 측면을 깨달을 수 있다. 



이런 연기, 드라마를 교육 과정의 하나로 둘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입시 과목으로 삼는다는 얘기를 접하면서 나는 다시 한 번 영미권 교육의 목적은 각각의 '개인'화라는 사실을 절감한다. 교육은 그저 기본 지식과 사고력을 기르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잘 표현할 줄 아는 인간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논리, 사고력 또한 자기 자신을 제대로 파악하고 탐구하려면, 필수적으로 필요한 능력이다). 한국과 가장 다른 영미권 교육의 또다른 특징인 '작문'이 한국의 국영수만큼 입시에서 중요한 과목(?)인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기 표현은 자기자신을 잘 알지 못하면 불가능하다. 글을 쓰기 위해, 연기를 하기 위해 학생은 각자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을 탐구하게 되고, 그러면서 각자 다른 사람과 다른 자기 고유성을 발견하고, 그렇게 제각기 각자가 서로 다른 고유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자기 자신과 상대방을 존중하는 평등을 익히게 된다. 단지 점수 뿐만이 아니라 자기소개서와 같은 에세이, 논술, 면접이 입학시험 점수만큼 중요하고 때로는 그 이상의 역할을 하는 건 '개인'화라는 교육 목적에 따르면, 당연한 현상이다.



한국 교육과 입시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서 영미권 방식을 일부 차용해도 소용이 없는 건 이 때문이다. 교육의 목적, 공교육을 통해 양성하려는 인간상이 애초에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갖고 영미식 입시 제도를 도입해도 도로아미타불이 될 수밖에 없다. 한국 교육은 자기 중심을 갖고 자기 자신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자립적 인간 양성이 아니라 내가 교육 받던 시기인 십수년 전처럼 여전히 다양하고 많은 지식을 알고 있는 인간을 양성하는 데 목적이 있는 듯하다. 요즘엔 단지 박학다식이 아니라 사고력 함양까지 포함하려는 정도랄까? 그렇지 않으면, 킬러 문항처럼 입학시험에서 변별력이 그처럼 중요할 리가 없다. 한국에서 중요한 건 학업 능력의 변별력이지 영미권처럼 자기 표현의 변별력이 아닌 것이다. 



지식이나 사고력 같은 학습 범위 안에서는 아무리 아이디어를 내 봤자 변별력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애초에 범위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 자체, 즉 자기 자신에 대한 표현과 연관지으면 변별력은 무한해진다. 자기 자신을 누가 더 잘 알고, 그 아는 걸 얼마나 잘 표현하는가 하는 건 모든 인간이 서로 제각기 다르게 창조됐듯 창조성 그 자체가 된다. 



작금의 킬러 문항 논란은 그저 현실성이나 공정성 같은 차원이 아니라 미래 한국인이 어떤 인간이어야 하는지, 교육이 지향하는 인간상이 무엇인지 같은 본질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영미권처럼 공교육으로 길러내려는 인간상을 '개인'으로 삼는 것은 ('개인'에 대한 개념적 이해가 낮은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어렵다하더라도 다른 나라 제도를 한국에 적용하고자 할 때, 그러한 제도가 지향하는 목적이 다르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으리라 생각한다. 목적하는 바가 다른 수단을 자꾸 적용하려는 시도로 인해 수험생을 괴롭히기만 하는 일은 적어도 멈출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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