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세대의 과제
고등학교 다닐 때 나는 가족에게 불만이 많았다. 그 때 내 일기장을 보면, 온통 엄마 아빠 그리고 내가 너무나 귀여워하고 좋아하던 동생에 대한 불만이 한가득이다. 나만 그랬던 건 아닌 듯하다.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는 절친은 방과 후 집에서 전화통을 한 시간 씩 붙잡고 서로 자기 가족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으면서 공감하고 웃으면서 친해진 아이들이다.
지금 돌아보면 가족에게 미안하고 스스로도 머쓱한 모습이지만, 프로이트에 의하면 이는 지극히 정상적인 정신 발달 과정이다. 청소년기에 겪는 소위 '아비 부정'이라는 정신 현상이다. 어른이 돼 홀로 서서 자기 삶을 일궈가려면 누구나 부모에게서 벗어나야 한다. 비단 물리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그렇다. 지금까지 내 보호막이었던 세계를 완강하게 부인할수록 하나의 독립적인 인간이 된다. 또, 머리가 커지면서 어린 아이가 자기 가족에게 가졌던 환상이 벗겨지는 현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환상을 만들어내는 습관을 아직 완전히 떨구어내지는 못한다. 자기 부모, 아비를 부정하는 아이는 대신 '상상의 아비'를 만들어낸다.(청소년기 이상적으로 그리는 모습을 한 아이돌에 탐닉하는 것도 이와 같은 부류의 현상이다.) 진짜 부모 형제는 완벽한 모습으로 따로 있는데, 어쩌다가 자기가 이 가족에게 맡겨져 잠시 이 고난을 겪는 것이라고 상정한다. 자기 자신을 일종의 '고아'로 만드는 것이다. 아마도 완전히 어른이 되는 오랜 시간 자기 자신을 지탱하기 위한 장치가 아닐까 한다. 점차 어른의 세계에 접어들고 다양한 현실 경험을 통해 진짜 어른이 되면서 그는 자기가 만들어낸 '상상의 아비'는 존재하지 않고, 자기가 부정했던 현실의 아비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깨닫는다. 이제 '상상의 아비'를 부정하고 현실의 초라한 아비를 존경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이 누구에게나 순탄하게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수순은 아니다. 현실 경험을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경험을 하면서도 계속 자기 뜻과 맞지 않는 현실을 부정하면, 완벽한 존재인 '상상의 아비'가 허구의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라캉은, 자라면서 미움으로 바껴야 할 '상상의 아비'에 대한 태도가 계속 존경으로 지속될 때 파괴적 결과를 피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이 이론은 프로이트의 '가족 로망스'라고 한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이것이 한 인간 개인의 정신 성장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나 혁명가의 정체성 서사도 같은 과정을 겪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가령, 프랑스 혁명을 기점으로 급성장하는 민주주의 그리고 그것이 낳은 서구의 '시민의식'도 정확히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친다. 민주주의의 '아비'는 봉건체제이며, 서구 시민의식의 '아비'는 귀족의식이다. 프랑스 혁명으로 대표되는 민주주의는 그에 앞선 봉건체제를 부정하면서 발전했으며, 합리성 실용성 이성으로 대표되는 시민의식은 그에 앞선 명분과 당위성, 형식, 초월적 관념과 이상 지향으로 대표되는 귀족의식을 부정하면서 탄생한 것이다.
한국도 조선 후 이 과정을 거쳐야 했는데 식민지화로 인해 기회를 놓쳤다. 한국인은 근대를 맞이하면서 조선이라는 '아비'를 부정해야 했다. 그런데 식민지화로 인해 오히려 부정해야 할 아비를 일종의 '상상의 아비'로 만든다. 아마 이 '아비 부정' 단계를 거치지 않은 탓에 오늘날 한국의 전통을 잇자라고 하면, 쉽사리 조선의 것을 그대로 되살리려는 한계를 보이는 듯하다. 아마 이 '아비 부정' 단계를 거치지 않은 탓에, 흔히 설민석 류처럼, 봉건 체제의 정치인이었던 왕과 그 양반들의 태도와 사고방식을 일꾼에 지나지 않은 민주 체제의 정치인에게 투사하려는 시도가 각광 받는 듯하다.
그래도 이후에 '아비'를 격렬하게 부정하는 단계를 거치기는 한다. 바로 민주항쟁, 민주투사로 대표되는 이들의 독재 체제 부정이다. 이들의 '아비'는 유신 독재, 개발시대다. 그리고 '아비'를 부정하는 힘든 과정을 버티기 위해 이들 역시 '상상의 아비'를 만들어낸다. 그 '상상의 아비'가 허구의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초라한 현실의 아비를 포용할 때 이들은 비로소 성장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 그러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다 자라 몸은 자랐는데도 여전히 '아비 부정'을 벗어나지 못하고 '상상의 아비'를 쫓고 있는 듯 보인다.
민주화 세대가 자신이 그린 '상상의 아비'가 허구의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할 수도 있다. 마치 민주화 세대의 '아비'였던 독재 개발 시대 세대가 그 자신들의 '아비'였던 조선을 부정하지 않은 채 '상상의 아비'로 남겨둔 것처럼 이들도 진짜 아비와 상상의 아비를 구분하지 못하고, 계속 '아비 부정'하는 단계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 모든 것은 그 다음 세대의 몫일 테다. 민주화 세대를 '아비'로 둔 세대다. 이들 역시 '아비 부정'을 거쳐야 하는 만큼, 민주화 세대 역시 부정당할 것이다. 그러나 다음 세대는 무질서하고 갈등이 난무하는 현실을 직접 경험하면서 그 다 자라지 못한, 미처 다 성장하지 못한 '아비'인 민주화 세대를 이해하고 포용해야 한다. (나 역시, 이 글 역시, 그들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다.) 그 때, 비로소 한국은 권위주의가 아닌 민주주의 사회로 거듭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