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주현 Jan 04. 2019

[플라톤] 정치인은 리더인가? 심부름꾼인가?

정의는 강자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다 - ≪국가론≫ 제1권 정의의 이익

  대통령(정치인)은 리더인가? 행정부 리더라는 건 알겠는데 우리 주권을 표상한다고 해서 주권 표상체가 곧 리더이기도 한 것일까? 그렇다면, 같은 논리로 우리 지역을 표상한다고 해서 국회의원이 그 지역민의 리더인 것인가? 


  선거철 정치인 본인은 늘 유권자의 충실한 심부름꾼이 되겠다고 말한다. 이 말을 들으면서 유권자는 수긍한다. 하지만 여론에서 정치인에 관해서 얘기할 때면 흔히 리더의 자질을 언급한다. 때론 조선시대 왕이나 군주 예를 들면서 이들을 모범으로 삼거나 아니면 경계하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정치인은 심부름꾼인가 리더인가? 실수와 작은 혼동이라고 보기에는 그 간격이 너무나 크다.      


  정치인의 역할에 대해서 우리는 왜 이렇게 극단적으로 혼란스러워하는 것일까? 몇 가지 이유를 꼽아보자.


  첫째, 추종 본능이다. 선사시대부터 농경시대를 이루기 전까지 수만 년 동안 인류는 무리를 이뤄 생활했고 그 무리에는 일종의 추장 같은 리더가 있었다. 농경시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농사 생산량은 노동력이 좌우한다. 게다가 요즘 같이 자동화된 농기계가 없던 시절엔 노동 인력은 아주 중요하다. 대부분 하루 종일 농작물 생산 작업을 하고 중요한 공동체 사안은 양반, 귀족 같은 소수가 결정한다. 농업에 종사하는 다수는 사안에 대해서 검토하고 고민하고 토의할 시간도, 여력도 부족하다. 이런 환경에서는 소수의 결정을 믿고 따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근대화, 산업화로 노동으로 보내야 하는 시간이 감소하면서 사람들 교육 수준이 올라갔고 여유 시간도 생겼다. 따라서 공동체 사안에 대해서 검토하고 고민할 지적, 환경적 여건을 갖추게 됐다. 민주주의 발전은 이런 조건, 환경 변화와 함께 이루어졌다. 하지만, 근대화 산업화 이후는 인류 역사에서 아주 짧은 기간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우리는 불과 50여 년 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인류 선조에게서 물려받은 추종 본능은 아주 강력하다. 이토록 강력한 추종 본능은 단지 주권 표상자라로서 눈에 뜨인다는 이유, 그리고 다수 권한을 일부 위임받은 자라는 이유로 정치인을 리더로 착각하게 만든다.


  둘째, 공공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로서 때로 유권자 의사에 반하는 결정을 해야만 하는 경우다. 공동체의 장래를 위해서는 단기 이익에 반하는, 때로는 도리어 손해를 보기까지 하는 일에 찬성해야 할 때가 있다. 가령, 복지 확충을 위해서 소득이 있는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증세하는 방안이 필요하다면 자신을 뽑은 유권자의 저항이 있더라도 그 대의기관은 이를 찬성해야 한다. 이러한 결정을 할 때는 가히 사회 구성원의 리더라고 할 만하다. 유권자가 미처 고려하지 못하는, 또는 외면하는 공동체 전체 이익을 위해서 대의자가 사회 구성원을 이끄는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두 번째 경우라 하더라도 여전히 의문스러운 부분이 남아있다. 그것은 바로 그러한 결정을 하는 자가 우리보다 뛰어난 수준을 가진 특별한 사람(계층)이 아니라는데 있다. 즉, 우리가 채택하고 있는 민주주의에서 지배계층은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인 것이다.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신분 차별, 계급 차별이 없다. 모두가 평등하다. 모두가 평등하다는 말은 누구나 선거에 입후보자로 출마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의미다. 우리 주권을 표상하는 대의자는 그런 평범한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다. 따라서 우리가 공동체 미래를 고려하는데 부족한 모습을 보인다면 우리 가운데서 선출된 대의자 역시 미래보다는 현재 이익밖에 보지 못하는 수준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 않고, 대의자가 미래를 위한 현명한 판단을 내린다면 그 사회 구성원 수준 역시 그와 비슷할 것이다. 이 경우, 대의자의 판단은 유권자 의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므로 대의자가 리더 역할을 한다고 보기 어렵다.     


  군주제에서 지배계급은 왕족이고, 통치자는 군주다. 즉, 주권 표상을 군주가 한다. 귀족제에서 지배계급은 귀족이고 통치자는 귀족 가운데서 뽑는다. 주권 표상은 선출된 그 귀족이 한다. 민주제에서 지배계급은 민중이고 통치자는 민중 가운데서 뽑는다. 주권 표상은 선출된 그 사람이 한다. 군주제와 귀족제에서는 리더가 있다. 군주와 귀족이다. 민중을 포함한 나머지 사람들이 팔로워다. 신분이 나눠져 있다면 민주제에서도 리더가 있다. 민중이다. 군주와 귀족을 포함한 나머지 사람들이 팔로워다. 하지만, 오늘날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사실상 신분 구분이 없다. 군주와 귀족이 남아있는 국가가 있지만 상징적 존재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 자신이 공동체 일을 결정하는 대의자 수준에 이르러야 한다. 훌륭한 대의자를 원한다면 우리 자신이 훌륭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플라톤이 ≪국가론≫ 제1권 정의의 이익 편에서 정의는 강자 이익이 아니라고 설명하는 부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진짜 통치자(강자)는 자기 이익이 아니라 피통치자(사회 구성원) 이익을 위해서 지시를 내린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진짜 의사라면 돈이나 명예 또는 다른 기타 이익을 위해서 환자를 치료하지 않듯이 말이다. 물론, 의사의 경우, 환자를 잘 치료하면 돈이나 명예 또는 다른 보상을 받을 수는 있다. 하지만 진짜 통치자는 그런 보상조차 바라지 않는다. 돈을 바란다면 통치자가 아니라 고용된 사람이라는 의미가 되고, 명예를 바란다면 통치자가 아니라 야심가라는 의미이며, 직권을 이용한 사적 이익을 취한다면 통치자가 아니라 도둑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진짜 통치자가 자기 이익이 아닌 피통치자 이익을 위해 지시를 내리는 이유는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다. 형벌이란 자기보다 열등한 사람의 지배를 받는 상태다. 고용되거나 명예를 인정받으려면 누군가에게 복속돼 있어야 한다. 도둑질 역시 자기 자신이 부족한 상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자유롭지 못하다.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민중이 통치자다. 물론, 플라톤 시대 민중은 지금 우리 민중과 의미가 다르다. 그 시대 민중은 노예가 아닌 도시에 사는 성인 남자인 아테네 시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과 크게 다를 건 없다. 어차피 그 당시 노예나 여자는 인간이 아닌 소유물로 여겼으므로 이들을 피통치자로 인식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시대나 지금이나 민중이 통치자라는 말은 스스로 사회 공동의 일을 결정하는 주체자라는 의미다. 그리고 우리가 진짜 통치자라면 자기 이익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즉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 의사 결정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도 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우리가 어떤 사안에 대한 의견을 가질 때 나보다는 타인의 이로움을 더 먼저 생각하나? 우리 자신은 자기 이익, 자기가 사는 지역 이익을 우선 주장하면서 국회의원이 자기 지역만 챙기려고 하는 모습은 못마땅해하지는 않던가? 국회의원이 자기 지역 이익만 우선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우리 뜻을 그대로 대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문 #철학 #정치철학

매거진의 이전글 [플라톤] 뛰어난 개인이라도 여럿이 모이면 우매해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