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의 만인에 의한 투쟁
언론에서 흔히 소득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고 말한다. 가진 사람들이 없는 사람들과 이익을 공유하지 않고 더 가지려고 탐욕을 부린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뉘앙스를 풍긴다.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이 부자에게 세금을 더 걷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모습을 전하며 부러워한다. 우리 재벌도 그런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보여주길 바란다. 이익을 공유하려는 모습은 바람직하지만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이 부자 증세를 강하게 외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가계소득 상위 10% 경계점과 중간층 50% 사이 격차가 지난 30년 동안 계속 증가했다. 상위 1%, 0.1% 소득은 더 많이 증가했다. 말 그대로 제일 많이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이 갖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는 다르다. 한국의 소득불평등 변화는 상층의 소득 급증 때문이 아니라 중간층과 하층의 소득 격차 확대 때문이다. 통계청에서 제공하는 도시 2인 가구 이상 균등화 소득의 불평등 변화 추이에 의하면, 소득 상층과 중간층 격차는 지난 25년 동안 거의 변화가 없다. 반면, 소득 중간층과 하층 격차는 ′90년에 1.9정도에서 ′15년 2.6으로 상당히 많이 커졌다. 이는 우리 사회 불만 원인이 선진국과 다르게 최상층의 이익 독식 때문이 아니라 절대 다수인 중상층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최하위층을 외면하기 때문인 것이다.
김창환 캔자스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 같은 분석을 하면서 중상층이 하위층을 외면하는 이유를 ‘불안’이라고 지적한다. 경기가 둔화되면서 기업은 구조조정을 피할 수 없고, 정규직도 언제 잘릴지 모를 운명이다. 비정규직은 웬만해서는 정규직으로 바뀌기 어렵다. 직장을 잃으면 기댈 곳이 없다. 당장 생계가 막막한데 노년 걱정은 사치다. 경제구조 개혁, 노동 개혁 등 여러 방안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비정규직 4대 보험, 정규직의 고용보험 확충, 노령 연금 같은 사회 안전망이 갖춰져 있으면 그나마 중산층이 느끼는 ‘불안’이 감소할 것이다.
사회 안전망이 요원한 현실에서 살아남으려면 각자도생하는 수밖에 없다. 자기 앞가림이 급한 사람들에게 어려운 이웃이 보일 리 만무하다. 우리에겐 연대가 필요하지만, 불안을 안겨주는 현실에 급급해 분열하는 건 당연하다. 생존, 즉 자기 자신에 대한 안녕을 예측할 수 없어서 생기는 불안이 커질수록 권력 욕구가 증가한다고 철학자 한병철이 지적했듯이, 계속 위로 올라가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현실이다. 자기 능력만 믿고 살아야 하는 상황에서 생기는 갈등 역시 투쟁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우리는 지금 홉스의 명제 ‘만인의 만인에 의한 투쟁’ 상태인 것이다.
물론 홉스 시대는 지금 우리 보다 훨씬 직접적으로 생존 위협이 난무했다. 오랜 종교 전쟁 외에도 개인의 총화기 사용에 대한 규제가 없었다. 그런 여러 요인 때문에 폭력이 흔하게 일어났고 살인으로 죽는 사람도 아주 많았다. 스티븐 핑거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 의하면 13세기 유럽 인구 10만 명당 살인건수가 매년 50명 이상이었고 영국 귀족의 사망 원인이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입은 ‘창상’ 때문이었다. 세기가 지날수록 살인율은 점차 나아지는 양상이었지만 눈에 띄게 감소한 시기는 18세기 후반이다. 이를 보면 홉스가 살던 시대에도 신분에 상관없이 일상에 폭력이 난무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총화기 사용과 일상의 폭력을 규제해서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을 끝내는 것이 곧 자유고 인권이고 행복이었을 것이다.
난무하는 폭력을 제어할 수 있는 주체는 그 모든 폭력의 상위에 있는 막강한 권력뿐이다. 홉스는 『리바이어던』 2장에서 국가와 주권자 그리고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설명하면서 여러 군데 걸쳐 절대 권력을 강조하고 정당화한다. 군주의 무제한적 권력이 아무리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한들 내전이나 타국의 침입 같은 혼란스러운 상황에 비하면 보잘 것 없다고 말한다. 혼란한 사회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면서 홉스는 이미 아무 것도 그 권위에 대항하지 못하는 강력한 군주 권력이 필요하다고 결정한 것이다. 그래서 홉스의 권력은 위협과 공포를 수반한다. 우리도 우리를 각자도생하게 만드는 ‘불안’을 끝내려면 연대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연대’는 증세 합의다. 고용보험, 노령 연금 같은 우리 모두를 안전하게 지켜줄 사회보험 곳간을 채우려면 다 같이 각자 호주머니 안 쥔 돈을 조금씩 내놓아야 한다. 하지만, 거부한다. 있는 사람들이 더 내놓으라고 남에게만 미룬다. 이때 위협적인 막강 권력이 있다면 힘을 발휘할 것이다.
홉스가 위협과 공포를 수반하는 막강 권력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의 인간관 때문이다. 그는 정신을 통제할 수 없는 것과 통제할 수 있는 것으로 구분한다. 통제할 수 없는 정신은 욕망이나 정념에 이끌린 상태다. 욕망은 상상력, 즉 이전에 본 이미지가 자극한다. 이전에 본 이미지가 떠올라 어떤 욕구가 생기기 시작하면 운동, 즉 의지 작용 때문에 끊임없이 원하는 대상을 계속 가지려고 하는 것이다. 욕망이 곧 희망이고, 욕망을 포기하는 것이 곧 절망이다. 통제할 수 있는 정신은 생각을 일으킨 원인을 찾는 것과 생각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결과를 모두 고려하는 사고과정일 뿐이다.
자기 이익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자연스러운 인간 본래 모습이다. 공포는 손해를 볼 것 같다는 판단이며 용기는 공포에 맞서는 것이다. 감각 없는 인간이 없듯이 욕망이나 공포 없는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하는 욕망의 절제를 부정한다. 따라서 사회 체제는 이러한 사실을 반영해야 성공할 수 있다. 불안하게 사는 게 각자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므로 연대할 것을 합의해야 하지만, 자기 이익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인간이므로 사람들이 합의를 지키게 하려면 강제력을 둬야 하는 것이다.
홉스가 보는 인간은 철저히 수동적이다. 이전에 본 이미지, 즉 외부 자극으로 인해 생긴 욕망은 스스로 운동하기 시작해 끊임없이 욕구를 자극한다.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정신은 인과관계를 밝히거나 논리를 만들어내는 지적 작용뿐이다. 욕망을 통제할 능력이 인간에게 없다. 인간은 스스로를 관리하지 못하므로 막강한 힘을 가진 자에게 자기 권리를 모두 양도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래야 목숨을 보존하고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 홉스의 군주제는 폭력에 두려워하는 인간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가 아니라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무력한 인간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