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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사랑을 말하면서 '번 아웃'을 갈망하는 현대인

자기 사랑은 자기 욕구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구분하는 것부터

by 홍주현

아이 방학 동안 캐나다에서 머물다가 돌아온 친구가 있다. 그녀는 그곳에 있는 동안 연일 이만 보 이상씩 걸어다녔고, 다녀와서는 시차 문제로 잠을 잘 자지 못한 나머지 급기야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평소 체중 관리에 대한 관심이 집착 수준인데, 서구권 특유의 고열량 음식 때문인지 캐나다에서 그렇게 많이 걸어다녔는데도 오히려 몸무게가 꽤 많이 올라 그에 대한 스트레스까지 받고 있다가 자기 상황을 호소하려고 전화를 했다.


감기에 걸릴 정도면, 일단 잘 먹고 잘 자면서 몸을 푸욱~ 쉬게 내버려 둬야 하는데 빨리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는 생각, 빨리 한국에서 다시 뭔가 배우면서 일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자기 자신을 들들 볶고 있었다. (친구는 배우자와 헤어져 경제적 자립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친구가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들들 볶는 진짜 원인은 그런 상황에 있지 않았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자기 모습을 게으르다고 규정하고 한심한 루저라고 생각하는 데 있었다.


'나는 왜 이렇게 게으를까. 정말 한심해. 나 이렇게 있으면 정말 루저가 되는 게 아닐까? 안 돼! 절대 안 돼!'


이렇게 자기 자신을 채찍질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녹초가 되고 아픈 몸이 움직여질 리 없다. 몸이 머리가 구상하는대로 움직이지 않자, 자기 자신에 대한 책망이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가만히 듣다가 나는 너무 놀라 말했다.

"너 왜 이렇게 너 자신을 괴롭혀? 힘들고 아픈데 어떻게 계속 뭘 할 수가 있어? 만약 네 아이(초등학생)가 시차 등으로 감기에 걸려 컨디션이 좋지 않아도 그렇게 다그칠 거야? '그래도 학원은 가야지! 그 학원 끝나면 이것도 해야지!' 이렇게? 만약에 몸이 힘들어서 잘 못하면, '너 왜 이렇게 게으르니! 엄마가 보기에 넌 참 한심하구나.' 이렇게 말할 수 있어?"


이 말에 대한 그녀 반응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솔직히 말하면, 그녀는 아이에게도 그럴 것 같다. 아픈 몸이 그걸 다 할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으니 아이를 쉬게 하면서 그렇게 말하지는 않겠지만, 아마 속으로는 그와 비슷하게 생각할 것이다.

'쟤 저러면 안 되는데. 조금 더 악착 같이 할 일을 다 해야 하는데. 다른 애들은 공부하고 뭐하고 다 하고 있을 텐데, 쟤 저렇게 가만히 있으면 뒤처질 텐데..'


자기 몸을 왜 그렇게 혹사하며 채찍질 하냐는 말을 하기 위해 그녀 아이 비유를 들었을 때, 반응이 뭔가 주저하면서 그래..라고 하는데 수긍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분위기 였기 때문이다. 한편, 이 말에는 단박에 반응했다.

"너는 너 자신을 너무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친구는 평소에도 자기를 사랑하는 일에 대해서 민감한 듯 보였다. 그녀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은 대개 무언가를 사는 것이었다. 어떤 일을 해냈거나 끝냈을 때 주로 필요하지 않지만 평소 갖고 싶었던 것을 사면서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말한다. 나나 또 다른 친구는 '뭘 그렇게 나에게 선물을 자주 주냐'는 식으로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데, 그런 것에 별로 의미를 두지 않아서만은 아니다. 그녀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게 뭔가 억지스럽게 느껴지는 건 평소에 그럴 정도로 자기 자신을 아끼는 느낌을 받지 않아서다. 그것은 바로 위와 같은 태도다.


평소에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모진 말을 하며 채찍질 하면서 못 살게 굴고 닦달해서 일을 이루고 나서, 그 결과가 흡족하자 그제서야 자기 자신에게 선물을 선사하는 모습을 어찌 자기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아이가 힘들어하고 몸이 아파도 채찍질 하고 닦달한 끝에 좋은 성적을 받거나 어떤 상을 타자 그제서야 아이에게 잘했다고 사랑한다고 하는 것과 똑같지 않은가.


아이는 자기 욕구를 인정받지 못하고 부모가 원하는 것을 가져다 줘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고 무의식적으로 습득한다. 자기 자신도 똑같다. 에고가 원하는 목표에 부합하지 않는 욕구는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 머리로 설정하고 원하는 것을 달성해야만 자기 자신이 사랑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스스로 여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형적으로 내면화 된 자기 소외다. 그녀도 어릴 때 부모에게 이처럼 조건적인 사랑을 받았을 수도 있다. 아니면, 바빠야 능력있고 바람직한 생활 태도라고 말하는 현대 사회의 세뇌의 영향일 수도 있고.


전자는 모르겠지만, 후자의 영향은 확실하다는 것이 그녀의 이후 말에서 드러났다. 다시 학원을 다니려면 아이를 아침 일찍 학교에 보내고 대중 교통으로 한 시간 넘게 걸리는 학원까지 매일 다녀야 하는데, 이런 힘든 조건의 학원을 구지 다니는 것이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태도지만, 그래도 해야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사랑, 자기 자신을 위하는 태도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의미다. 몸의 욕구가 필요에 의한 것인지, 그저 쾌락을 위한 것인지 구분하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프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아 정말 쉬어야 할 때 몸은 생각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그녀는 이것을 '게으르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게으른 건 몸이 아프지 않는데 그저 더 편하고 싶어서 해야 할 일을 앞에 두고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지 아플 때 쉬는 건 게으른 게 아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니, 몸이 다 나아서 건강할 때 원하는 바를 성취하기 위해 먼 길 마다 않고 열심히 몸을 움직이는 태도를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녀 생각처럼 이런 태도가 자기를 괴롭히는 것이라면 자기를 위하는 태도는 배고프지 않아도 그저 더 먹고 싶다고 해서 과식하는 것, 걷기 싫어서 자동차만 타고 다니는 것 등처럼 정말 몸의 쾌락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자기를 위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적지 않은 사람이 이것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듯하다. '자기 사랑', '자존감' 같은 단어가 유행이지만, 무조건 바쁘게 살아야 열심히 사는 것이란 사회 통념에 그대로 따르기 위해 자기 자신을 무조건 채찍질 하면서 '자기 사랑'이나 '자존감'은 또 다른 어디, 멀리서 찾는 것 같다.


하기 싫은 일도 똑같다. 해야 할 일이지만 그저 익숙한 게 더 편하고 좋아서, 어려운 상황에 맞닦뜨리고 싶지 않아서 하기 싫은 마음이 드는 일이 있는가 하면, 정말로 해서는 안 될이라서 싫은 일이 있다. 하기 싫은 일을 하는 힘을 기르려면, 그것부터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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