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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주현 Jan 05. 2019

[아렌트] 논리의 노예

전체주의의 기원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이치를 따지는 습성을 가졌으면서도 곧잘 이성을 잃는 인간에게 경각심을 깨우는 말이다.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사람은 특히 기억해야 하는 말이다. 차가운 머리 없이 가슴만 뜨거우면 어리석은 행동을 하기 쉽고 뜨거운 가슴 없이 차가운 머리만 있으면 참혹한 결과를 낳기 쉽다.


머리만 차가울 때는 언제인가. 논리에 빠질 때이다. 논리에 지나치게 빠질 때는 언제인가. 아렌트에 의하면 외로울 때다. “외로움은 고독이 아니다. 고독은 혼자 있기를 요구하지만 외로움은 다른 삶과 함께 있을 때 가장 날카롭게 드러난다. 에픽테투스에 의하면 외로운 사람은 그를 향해 적개심을 노출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279) 


그렇다면 인간은 언제 외로운가?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첫째 경우는 인간의 모든 활동이 생존을 위한 노동이 되어 자기가 하는 일, 노동에 아무도, 자기 자신 조차도 관심을 갖지 않을 때다. (277) 마르크스는 이를 인간 소외라고 하고 하이데거는 존재 망각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여기서 노동은 아리스토텔레스, 스피노자, 마르크스, 하이데거가 하나같이 말하는 자기 본질을 구현하는 일이다. 아렌트는 ‘제작’이라고 표현한다.


두 번째 경우는 고독 속에서 정체성을 확인하고 사유의 대화를 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을 잃을 때다. “고독한 사람은 혼자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과 함께 있을 수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과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279) ‘제작’은 항상 고립 또는 고독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자기 일을 하려는 사람은 세상과 잠시 거리를 두고 혼자 있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277) 그러나 한편으로 고독한 사람에게는 교우 관계가 중요하다. 내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나 자기 자신에게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280)


그런데 “공동체에 자기 창의성을 더할 수 있는 노동력이 파괴”될 때, 사유의 파트너로서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와 경험에 필요한 기초로서 세상에 대한 확신을 잃을 때 고독은 외로움이 된다. 인간은 “자아와 세계, 사유하고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을 동시에 상실”한다. (280) 자아, 타자, 세상을 잃은 인간에게 유일하게 남은 능력은 논리적 추론이다. (281) 논리적 추론은 경험이 필요하지 않다. 이러한 사유 방식은 공리처럼 자명한 전제에서 시작해서 연역적 또는 변증법적 논증으로 이론을 이어나간다. 이러한 논증은 “더 이상 사고의 수단이 아니다. 스스로 생산적이 되어 자동적으로 끝없이 생각의 노선을 전개“한다. (281) 


또한, 이 논증에는 현실 경험이 개입하지 않기 때문에 비현실적으로 일관성을 유지한다. (271) 이것이 이데올로기다. 이러한 내적 강요에 굴복한 인간은 논리의 독재 휘하에 들어간다. 그는 “외부의 독재에 굴복하면서 자유를 양도하는 것처럼 논리에 복종함으로써 자기 내적 자유를 양도한다.“ (275) 내적 자유란 논리의 자동적 전개를 멈추고 “새로 시작할 수 있는 능력과 같은 것이다.” 전체주의는 “어느 누구도 사유를 시작하지 않도록 논리성의 자기 강요적 과정을 동원”한다. “전체주의에서 이상적인 신하는 골수 나치나 골수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사실과 허구(즉 경험과 현실)의 차이와 참과 거짓(즉 사유의 기준)의 차이를 더 이상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276)


마르크스에 따르면 대중을 사로잡는 권력은 이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논리 과정에 존재한다. 노동자 해방이나 독일인의 역사적 사명 같은 이데올로기 본질은 점점 사라지고 사람들은 과정 자체에 함몰된다. 볼세비키 통치 아래에서 노동자는 제정 러시아가 탄압할 때도 보장됐던 권리마저 잃었고

애초에 전혀 관심 없던 전쟁으로 독일인이 고통당했던 이유는 '논리의 불가항력' 때문이었다. (273)


아렌트는 사람들이 히틀러에게 그토록 사로잡혔던 이유 중 하나를 이렇게 설명한다. (15) “사회는 항상 어떤 사람을 그가 자처하는 대로 즉각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천재인 체하는 사람에게는 천재로 받아들여질 기회가 항상 있다. 분별력의 결여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사회에서는 이런 경향이 강해져서 단지 의견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흔들림 없이 제시하는 사람은 여태껏 여러번 틀린 의견을 제시했다 하더라도 여간해서 자기 특권을 상실하지 않을 것이다. 히틀러는 수많은 견해 중 하나를 "매우 일관성 있게" 신봉하면 다양한 견해 사이에서 무력하게 동요하는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논리는 지적이고 합리적이다. 그래서 인간은 논리에 쉽게 설득된다. 하지만 논리적이라고 해서 무조건 이성적이라고 할 수 없다. ‘이성’은 인과를 따지는 합리일뿐만 아니라 정도를 지키는 중용이기도 하다. 논리 또는 합리에 매몰된 판단은 실제로 현실과 동떨어져서 의도를 왜곡하는 경우가 많다. 가령, 신용불량자가 되지 않도록 저소득자를 보호하려는 의도로 은행 등 제1금융권의 대출을 엄격하게 심사하도록 규제하면 실제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은 신용이나 담보가 부족한 저소득자가 되고 만다. 1금융권이 대출 심사를 강화할수록 신용이나 담보가 부족한 사람 순서대로 금리가 높아지는 2금융권, 대부업까지 밀려나기 때문이다. 대부업의 법정이자율을 과도하게 낮추거나 깡통전세에서 임차인을 보호하겠다고 금융기관의 담보권 행사를 규제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논리가 유효할 때는 오직 인간, 따뜻한 가슴이 논리의 주인일 때이다. 논리의 전개가 아무리 합리적일지라도 본래 목적, 사람, 현실에서 벗어나면 과감하게 수정하거나 새로 시작할 수 있을 때다. “인간이 논리에 의존하는 것은 자기 생각을 갖기 위해서다. 어떤 논리도, 설득력 있는 연역도 인간의 내적 자유인 '시작'을 지배할 수 없다. 왜냐하면 논리나 연역의 사슬도 전제라는 ‘시작’에서“ 맨 처음 전개되기 때문이다. (275)


“시작은 인간이 가진 최상의 능력이다. 실제로 모든 인간이 시작이다.” - 아렌트 

"시작이 있기 위해 인간이 창조됐다." - 아우구스티누스 (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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