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기 싫은 일을 하는 힘의 핵심과 응용
하기 싫은 일을 하는 힘의 핵심은 해야 할 '일'과 그 일에 대한 내 '마음', 즉 그 일에 대한 내 '판단'을 분리하는 능력이다. 싫은 건 대개 그 일에 대해서 갖고 있는 자기 주관, 판단이지 그 일 자체에 내재한 성격이나 특징은 아니다. 일단 그렇게 자기 주관을 일에서 떼어내 해야 할 일을 객관화 시켜야 이성을 찾고 싫어서 괴로워하는 자기 마음을 다룰 수 있다.
쉽고 간단하다. 하지만, 그 쉽고 간단한 작업은 자기 마음을 섬세하게 바라볼 수 있는 주의력을 요구한다. 또, 그런 주의력을 가지려면 솔직하게 자기 자신을 대면할 용기가 필요하다. 하기 싫은 일을 하는 힘을 기르는 연습은 마음의 무딘 칼날을 날카롭고 예리하게 갈아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예리한 칼날로 주의 깊게 일과 내 마음을 분리하는 작업은 비단 싫은 일을 조금 수월하게 할 수 있는 효과에 그치지 않는다. 현실, 진실을 가리고 있는 자욱한 관념의 안개가 조금 걷어지는 느낌도 가질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일, 소통 그리고 생각 역시 대부분 어떤 일, 사건, 현상과 그에 대한 의견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작업을 의견 부분에만 초점을 맞춰서 조금 더 섬세하게 진행하면, 의견과 그 의견을 말하는 사람까지도 구분하는 게 어떤 것인지 조금 감 잡게 되는 것 같다.
철학자 한병철이나 고병권 류의 책을 읽으면서 인상 깊었던 한 가지는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가 전부 홉스나 니체, 아렌트, 푸코 같은 시대를 뛰어 넘는 석학들의 주장인데, 그 주장을 사용하는 방식이 대부분 그것을 긍정하고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이의나 반론을 제기하는 식이라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아마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없는 언어의 한계 덕 아닐까.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사실 배제와 누락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가 언어를 이용해서 의견을 말할 때 그것은 어떤 현상의 일면만을 언급하는 것이다. 시간이나 지면 같은 물리적 제약의 문제 뿐만 아니라 핵심을 전달해야 하는 인간의 소통 능력에 내재한 한계도 원인인 것 같다.
그래서 누군가의 어떤 주장은 아주 다양한 다른 의견을 파생시키는데, 특히 그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때, 그 다른 의견은 반론이나 반박 같은 게 될 것이다. 한병철이나 고병권 같은, 또 논문도 이런 식으로 쓰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많은 학자가 자기 주장을 하는 방식이 그런 것일 테다.
그러고 보면, 그럴 듯한 새로운 의견이나 이론 같은 건 어찌보면 반박과 반론 덕에 생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반박과 반론은, 아니 그저 동의하지 않는 것 자체만으로도 건설적인 것 아닐까란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이것은 반드시 의견과 그 의견을 말한 사람을 구분해야만 가능하다. 그래야 상대 기분에 대한 걱정 없이 자유롭게 다른 의견을 말할 수 있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