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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주현 Mar 04. 2019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

북유럽의 휘게가 소소한 것들로 이루어진 이유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


그런데, 행복은 저절로 얻어지지 않는다. 필수요소를 충족시켜야만 한다. 지혜와  인내다. 우선, 지혜란 행복과 쾌락을 구분할 줄 아는 능력이다.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나 그것은 행복이 아니다.  술을 다 마시고 나서 느끼는 불쾌감, 술이 깨는 동안 느껴야하는 고통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것이 어찌 행복일까. 행복은 한 잔  하고 싶은 그 욕구를 따랐다가는 불행해진다는 사실을 아는 지혜와 그 욕구가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는 인내력을 요구한다.


지혜와 인내심은 행복과 거리가 먼 것 같다. 달갑지 않고 싫다. 그러나 그것 없이 행복을 얻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만약 지혜와  인내의 불편, 고통을 불필요한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가 쫓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쾌락이다. 이처럼 만약 행복이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라면,  우리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태어난 건 행복하기 위해서다. 지혜와 인내심을 터득하면서 행복한 순간을 지속해가는 과정이 삶 아닐까.  


기술 문명의 발전이 순간순간 우리 인내심을 위협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게 바로 이 때문일지도 모른단 생각도 한다. 넋 놓고 보게  되고 또 보고 싶게 만드는 바보상자의 등장 이후 휙휙 시각 정보를 변화시킬 수 있는 인터넷이 등장하고 급기야 하루 24시간,  일년 365일 그것과 떨어지지 않아도 되게 한 스마트폰, 나아가 책은커녕 이제는 인터넷 화면의 글을 힘들여 읽는게 아니라 넋 놓고  보고 있기만 하면 정보를 취득할 수 있는 유투브 대두..이런 흐름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더 강도 높은 수준의 지혜와 인내를 요구한다. 내가 행복하려면 그 모든 것이 자극하는 욕망, 욕구를 적절히 제어할 줄 아는 힘, 과거 시대의 사람들에 비해 상당히 높은 수준의 지혜와 인내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진보는 기술 문명 같은 가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혜와 인내심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 나,  개인의 자질이 좌우하는 것 아닐까. 지혜와 인내의 수준이 그것들에 도전하는 환경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면, 그는 아무리 휘황한  것들과 제도, 시스템으로 둘러싸여 있다 해도 행복하기 어렵다. 반면, 그런 자질 수준이 높은 사람들의 행복 지수는 당연히 높지  않을까. 덴마크의 휘게, 스웨덴의 라곰 같은 것들이 알고보면 소소하고 별 것 없는 건 어쩌면 그것들이 지혜와 인내심을 축적하면서 터득한 삶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핀란드의  팬츠드렁크는 지혜와 인내심, 즉 애매한 수준의 행복 기술을 지닌 상태에서 섣불리 따라했다가는 패가망신 지름길인 고수의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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