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로열 테넌바움>에서 볼 수 있는 리처드 세넷의 <무질서의 효용>
영화 <로열 테넌바움>을 봤다. 감독에 대한 정보가 없어도 영화 <그랜드부다페스트>를 봤다면, 같은 사람이 만들었구나란 생각이 떠오를 정도로 비슷한 형식에 비슷한 분위기의 코메디다.
로열 테넌바움은 한때 잘나가던 변호사로 뉴욕 중산층 가족의 가장이다. 친자인 두 형제와 입양한 한 소녀를 자녀로 둔 아버지다. 어느 날, 자의식 강한 아내가 이혼을 요구해 혼자 살게 되고, 세 남매는 엄마가 키운다. 엄마는 그 시대 미국의 중산층 가족의 엄마가 그랬듯 자녀 교육에 상당한 열을 올린다. 세 남매는 어린 나이에 각각의 분야에서 천재로 각광받을 정도로 성공한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그 세 남매의 모습으로 구현되는 듯하다. 아이를 완벽하게 키우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자 의무를 다하기 위해 온갖 사교육에 서슴없이 고액을 지불할 정도였던 엄마의 완벽한 통제 아래에서 세 남매는 어린 나이에 천재적인 성과를 올리고 성공의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나이만 먹어 몸만 커질 뿐 '어른'이 되지 못한다. 장남은 미성숙한 시절 즐겨 입는 빨간색 아디다스 츄리닝으로, 둘째 마고는 어린 시절 머리 모양 그대로인 단발로, 테니스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세째는 머리에 두른 테니스 띠로 어른이 되지 못한 채 청소년 시절에 머물러 있는 그들의 정신적 상태를 보여준다.
불의의 사고로 아내를 잃은 게 트리거가 돼 장남은 안전집착증에 빠져 있다. 그의 두 아이도 줄곧 그와 똑같은 아이다스 츄리닝을 입고 나오는데, 아마도 정신적으로 어른이 되지 못한 그가 자기 아이들을 그의 분신과 다름 없는 상태로 여기고 또 만들고 있음을 나타내는 상징인 듯하다. 즉, 부모와 아이는 한 몸인 것이고, 안전집착증에 빠져 있는 그는 아이들의 안전에도 지나치게 집착한다. 이는 그가 아이들을 철저히 자기 통제 아래에 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둘째 마고는 도덕적이고 똑똑하게 키우려는 엄마의 통제와 다르게 청소년 시절부터 현재까지 (해서는 안 될 짓인) 담배를 몰래 피우고 있고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세째 역시 여행만 다니면서 방황한다.
이혼으로 테넌바움 가족에게서 소외됐던 로열 테넌바움이 소동을 일으키면서 이들을 자기 삶의 궤도에 올려놓는다. 할아버지인 로열은 손자인 아이들을 몰래 데리고 나가 온갖 '나쁜짓'을 함께 저지른다. 가게에서 몰래 아이스크림을 훔쳐 먹는다든지, 달리는 트럭 끄트머리에 매달려 있다든지 같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도둑질, 또 절대 해서는 안 될 위험한 일이다. 이같은 짓은 일종의 금기를 깨는 이탈 행위이다. 그러나 이런 가벼운 일탈은 억압에서 벗어난 자유의 느낌이란 게 뭔지 알게 해주고, 또 위험한 일에 도전하는 게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 그런 아버지의 등장으로 온갖 금기의 억압과 통제에 억눌려 담배와 무절제한 잠자리 등 이상한 방향으로 욕구를 발산하던 마고와 세째도 자기 자리를 찾기 시작한다. 그 둘은 서로 사랑하는 자기 감정을 확인하는데, 아마 형제 간에 가져서는 안 될 감정이란 점에서 그 또한 금기를 깨는 상징인 듯하다.
이처럼 영화는 온갖 금기와 억압적인 규율 그리고 그것에 함몰될 때 사람이 몸 만 어른인 채 자기 삶을 살지 못하는 괴물이 된다는 걸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억압적인 분위기는 미국의 1960~7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 곧잘 발견된다. 흡사 19세기 영국인 줄 착각하게 만드는 분위기인 영화 다우트도 알고보면 60년대 미국이다. 이런 영화를 볼 때마다 나는 지금 우리 모습이 떠오른다. 엄마인 동서나 올케, 친구들이 아이들의 안전과 청결에 집착하는 모습(물론, 아빠도 크게 다르지 않고), "~해야 한다"에 함몰 돼 현실의 인과성을 부정하고 무시하는 각종 사회운동, 정책 그리고 그것들을 강렬하게 지지하는 목소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