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소 상장기업, 1972년 66곳에서 1978년 말 356곳으로!
오늘은 최근 읽은 책 "시장의 기억"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 위주로 말씀드릴까 합니다. 이 책은 한국 주식시장의 역사를 사건 중심으로 다루고 있는데,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1975년의 '5.29' 강제 상장 조치였던 것 같습니다.
이 조치가 취해진 배경은 1972년의 '8.2조치(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로 사채(私債)가 동결된 데 있습니다.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한국의 경제 위기와 극복" 63~64쪽),
첫째, 1972년 8월 2일 현재,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사채를 일주일 내에 전부 신고하는 한편 사채의 이자율을 은행 금리 수준(연 16.2%)으로 인하하고 원금은 3년 거치 5년 분할 상환토록 하는 것이었다. (중략)
둘째, 은행 등 금융기관이 기업에 대출한 자금 중 단기성 대출금의 30%를 장기저리자금으로 대환하였다. (중략)
셋째, 은행을 이용할 수 없었던 저신용/무담보의 중소상공업자 및 농림수산업자를 위해 신용 보증제도를 마련하였다. (중략)
넷째, 산업합리화를 위한 자금 500억원을 조성하여 산업합리화 기준에 맞는 기업에게 장기저리로 대출해주었다.
한 마디로 말해, 금리를 인하해주고 또 원금 상환을 유예해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채동결을 하고 보니,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바로 위장사채의 존재였죠("한국의 경제 위기와 극복" 68쪽),
어디서 사채를 조달하였으며 조건은 어떠하였는지가 공표되는 과정에서 (중략) 사채권자의 실체가 밝혀졌다. 밝혀진 다수의 사채권자가 채무기업의 주주였던 것이다.
사업체대표가 사업체에게 자금을 빌려주고, 그 이자를 기업회계에서 지출케 하는 위장사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개판이라는 말 밖에는 나오지 않죠. 당장 기업들이 어려우니 살려주기는 했지만, 이런 상황을 내버려둘 수 없어서 단행한 조치가 바로 1974년의 ‘기업공개와 건전한 기업풍토의 조성에 관한 대통령 특별지시(5·29조치)’였습니다. 이 조치의 핵심은 바로 개인 소유의 회사 주식을 상장시키라는 것이었습니다. 정부의 사채동결 조치 등으로 혜택을 입었으니, 이제는 '자기 것'이던 회사를 상장시켜 국민 누구나 소유할 수 있게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시장의 기억", 76쪽).
1975년부터 3년 동안 삼성·현대·선경(SK) · 럭키금성(LG) 계열사를 포함해무려 300여 개사가 '가족기업의 성벽' 허물기에 동참했다. 5·29 조치는 국내 대기업그룹이 재무구조를 개선하고 중화학공업화 투자”에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주식시장에도 활력을 불어넣어 경제의 지속 성장을 위한 내자 동원의 물줄기를 트는 성과를 거뒀다.
대체 1974년의 '5.29조치'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기에 삼성전자를 비롯한 주요 기업들의 상장이 봇물을 이뤘을까요? 그 이유는 '강제 상장'이었기 때문입니다("시장의 기억", 77~78쪽).
1974년 5월 29일 남덕우 재무부 장관은 대기업그룹에 청천벽력 같은 정책을 전달했다. '기업공개와 건전한기업 풍토 조성을 위한 대통령 특별지시', 이른바 5.29 강제상장 조치였다.
이 조치는 여신 50억 원 이상 대기업그룹을 '비우량(A)'과 '우량(B)’기업군으로 나눈 뒤 각각에 단 하나의 숙제를 던져줬다. 비우량 기업군은 기업공개를 포함하는 재무개선, 우량 기업군은 기업공개였다. 어느 쪽이든 구체적인 계획을 서둘러 내놔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금융 지원을 중단하겠다는 섬뜩한 경고도 곁들였다. 대기업그룹의 소유 집중 문제를 반드시 해소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당시 강제상장은 대다수 대기업그룹에 가혹한 처사였다. 투자자 보호 명목으로 공모가액 산정 때 액면가를 넘지 않도록 규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주주 지분율 51% 이하' 등 상장 요건을 맞추려면 헐값에대규모로 주식을 팔아야 했다. 상장사에는 액면가의 10% 이상 배당을의무화해 자본 축적에도 불리했다. 1973년 1월 기업공개촉진법 시행(1972년 8·3 사채동결의 후속 조치)에도 불구하고 신규 상장이 부진했던이유다. 당시 정부는 상장을 촉진하기 위해 감세(과점주주 소유 비율이 30% 이하일 경우 주주의 배당소득세 부담 완화 등 혜택 제공) 등 다양한 '당근'을 제시했지만 제일제당(현 CJ, 1973년 상장)과 롯데칠성음료(1973년 상장) 등 소수만 체면치레로 기업을 공개하는 데 그쳤다.
"백화점식 확장과 사치에 눈먼 일부 기업 탓에 왜 기업인 전체가 욕을 먹어야 합니까!"
5·29조치 뒤 열린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의장에서는 울분과 자성의 목소리가 뒤섞여 나왔다. 일부 회원사는 "나중에 정책이 흐지부지되면 먼저 상장한 회사만 손해 아니냐!" 하며 태풍이 지나가길 기다리겠다는 심산을 내비치기도 했다.
하지만 안보 위기(베트남 패망)라는 비상시국에서 '지나친 경영 간섭'이라는 주장은 호응을 얻지 못했다. 사채동결조치 과정에서 드러난 방만 경영으로 높아진 반재벌 여론도 부담이었다. 재계에 남은 선택지는 없었고, 버틸 수 있는 시간도 많지 않았다.
특히 1975년의 '8.8조치'는 더욱 강화된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시장의 기억", 79쪽).
발등의 불을 실감한 대기업들이 대책 마련을 위해 연달아 회의를 열던 그해 8월, 재무부는 다시 '기업공개보완시책(8·8조치)'을 발표하면서 마지막까지 좌고우면하던 기업인들의 동아줄을 잘라버렸다. 8.8조치는 그룹사의 모기업, 중화학공업, 수출·차관 실적 등 정량 지표로'국민적 대기업' 리스트를 추려 일반에 공개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사적인 욕심으로 '소유의 집중'을 포기하지 않고 버티는 기업이누구인지 국민에게 공개해 여론 재판을 받도록 하겠다는 뜻이었다.5.29 조치로 꺼내든 정부의 칼끝은 이제 개별 기업의 턱밑을 겨누고있었다.
정부의 일관적인 상장 유인 정책은 1973년 10월 '1차 오일쇼크’ 이후의 경기 회복과 맞물려 대기업그룹의 상장 물결을 일으켰다. 8·8조치 두 달 뒤 발표한 '국민적 대기업' 105개사 가운데 65개사가 제시 시한인 1976년 6월 말까지 기업공개를 완료했다. 탄력을 받은 재무부는1976년 7월에 2차로 101개사 명단을 내걸었다.
거래소 상장기업은 1972년 66곳에서 1978년 말 356곳으로 급격히 불어났다. 주식과 채권 공모가 줄을 이었고 증시를 통한 자금 조달은1972년 247억 원에서 1976년 2,622억 원으로 4년 만에 10배로 급증했다. 현대종합상사, 선경화섬(SK케미칼), 반도상사(LG상사), 한국비료(롯데정밀화학), 한국화약(한화), 농심, 대림산업 등 오늘날 글로벌 기업'도 성장한 회사들이 잇달아 주식을 공모하고 투자를 확대했다.
중화학공업에 투자하기 위해서는 많은 자본이 필요한데, 은행 대출이나 사채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으니 상장시켜서 자본을 조달하자는 것이 정부의 속내였습니다. 더 나아가 사채 동결 조치로 드러난 기업들의 검은 치부를 응징할 목적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주식시장도 이 덕분에 본격적인 첫 발을 내딛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시장의 기억", 80쪽).
새내기주의 러시는 1975년을 전후로 주식 대중화의 꽃을 피웠다. 신규 상장기업은 며칠간 가격제한폭까지 상승했고 공모 청약일에는 새벽부터 번호표를 받으려는 인파가 구름 때처럼 몰려들었다. 선착순 청약에 실패한 투자자들이 소동을 일으켜 경찰이 출동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줄을 대신 서주는 대리청약 '알바'와 위조 번호표도 등장했다. 유통시장도 달아오르며 주식 거래대금은 1972년 700억 원대에서 1976년에는 6,000억 원을 넘어섰다. (중략)
주식시장의 대중화와 더불어 제도적 틀도 현대적 모습을 갖춰나갔다. 5.29 조치 2개월 뒤인 7월 13일에 나온 '종업원지주제도 확대 시행 방안'은 근로자들이 경영과 이익 배분에 참여하는 우리사주조합의 시대를 열었다. 금융회사들이 손잡고 대규모 공모증권을 사들인 뒤 시장에 푸는 총액인수제도도 이때 탄생했다. 1977년에는 미국 증권관리위원회SEC를 본뜬 증권관리위원회(현 증권선물위원회)와 집행 기관으로서 증권감독원(현 금융감독원)이 발족해 투자자 보호를 책임졌다.
물론 아직까지도 한국은 '주주경시 경영'이 지속되는 중입니다만.. 아무튼 이 때가 한국 주식시장의 얼개는 대략적으로 다 갖춰졌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즐거운 독서, 행복한 인생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