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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춘욱 Nov 30. 2022

대한민국 금융잔혹사2 - 율산그룹 이야기

수출 실적이 나올 때까지만 친절한 정부! 


최근 읽은 흥미로운 책 "대한민국 금융잔혹사"에서 율촌그룹의 흥망성쇠를 다룬 부분을 인용해보겠습니다. 혹시 지난 번 글을 읽지 않은 분들은 아래 링크 글을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대한민국 금융잔혹사 - 기업공개 촉진법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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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율촌그룹 설명하기에 앞서, 1970년대 한국 경제의 시스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8.3' 사채 동결조치에서 보듯, 한국 정부는 수출기업들에게 강력한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있었습니다(아시아의 힘, 274쪽).


한국정부는 다른 나라의 정부들만큼 물가상승을 걱정하지 않았다. 기업들이 개발계획을 따르고 제품을 해외에 팔 수 있는 한 은행들은 돈을 빌려주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처럼 자금이 지원되는 환경에서 연간 평균 수출 증가율은 1960년대에 40%, 1970년대에는 25% 이상을 기록했다. 그에 따라 GDP 대비 수출 비중도 1960년대 3.4%에서 1980년대에는 35%까지 상승할 수 있었다. 한편 물가 상승률은 연 평균 15~20%였다.

정부가 선호하는 기업에게 제공되는 자금은 풍부했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무료이거나 아주 저렴했다. 가장 저렴한 융자는 대개 -10%에서 -20%의 실질금리로 수출업체에 제공되었다. 수출업체의 입장에서 국내 물가상승률을 반영해 가격을 올릴 수만 있다면, 사실상 돈을 빌리는 편이 이득이었다. 


정부가 이런 강력한 인센티브를 제공한 이유는 '수출 촉진'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남미나 동남아 국가들이 수입대체 산업화를 추진했지만, 박정희 저부는 정반대로 수출촉진 산업화를 적극 추진했죠. 특히 70년대 말에는 조선이나 화학 철강 등 이른바 중화학 공업 산업을 육성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즉, 수출만 하면 웬만한 흠은 넘겨줄 정도로 너그러웠습니다. 


대신 어떤 기업이 '기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싶을때에는 가혹할 정도로 강력한 구조조정의 칼날을 휘둘렀죠. 바로 율산 그룹이 대표적인 사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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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산그룹의 역사는 1974년 9월 당시 만 26세였던 신선호가 율산실업을 창립하면 시작했습니다(대한민국 금융 잔혹사, e-book 165쪽). 


율산의 급성장은 쿠웨이트발 한 무더기의 신용장(L/C)에서 시작된다. 훗날 원기업을 세운 원길남이 국내로 보낸 각종 건축자재 수입 L/C였다. 채산성이 없어 다른 기업들이 외면한 이 L/C를 받아들고 율산은 대모험을 강행했다. 화주가 선주 역할까지 함께하는 새로운 방식의 수출기법을 개발, 성공한 것이다.


배를 빌려 하역할 때 항구가 배로 가득 차 순서가 밀리자, LST와 헬기를 이용해 마치 해병대 상륙작전 같은 하역작업을 벌여 중동지역 기업가와 왕족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 잡았던 것입니다(대한민국 금융 잔혹사, e-book 167쪽). 


율산은 1975년 12월 수출대금으로 받은 가용자금을 활용, 당시 서울신탁은행 관리하에 있던 신진알미늄을 인수해 율산알미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율산으로는 첫 번째 기업인수였다. 경기도 광주 소재 신진알미늄은 우리나라 자동차 업계의 효시격인 신진자동차 김창원이 설립한 회사로 알루미늄 새시 등을 생산하고 있었다. 연간 10억원의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지만, 사업성은 밝았다. 율산은 단돈 5억원으로 신진알미늄을 인수했으니 새우가 고래를 삼킨 격이었.


이런 식으로 확장을 시작해, 율산그룹은 1978년 봄에는 율산산업과 율산알미늄 등 14개 회사를 거느린 대기업으로 도약했고 종업원은 8천 명을 넘어섰습니다. 이런 가파른 성장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정부의 적극적인 수출 촉진 정책 덕분이었죠(대한민국 금융 잔혹사, e-book 168쪽). 


율산 급성장의 또 다른 배경은 정부의 강력한 수출 드라이브 정책의 산물인 수출금융이었다. 당시 수출오더만 확보하면 즉시 은행에서 받을 수 있는 수출금융 금리가 연 7~9%로 일반 대출금리(20~30%)나 사채금리(40%대)와 비교하면 공짜나 다름없었다.

또 수출 대금은 2개월 후에 지불하게 되어 있어, 수출 업체들은 수출금융으로 확보한 자금을 굴려 막대한 단기차익을 얻을 수 있었다. 더욱이 율산의 주요 수출품목인 건축자재가 전부 외상으로 거래되었던 만큼, 다른 수출 업체에 비해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


박정희 정부는 수출이 잘 될 때에는 수출기업이 다른 길로 빠지더라도 수수방관했습니다. 그러나 일단 수출이 잘 안되기 시작하면 바로 손절했습니다(대한민국 금융 잔혹사, e-book 169쪽). 


율산의 주요 수출 품목인 시멘트, 합판, 철근 수출이 돌연 금지되었다. 또 3억 달러 규모의 사우디 주택성의 건설공사가 갑자기 지연되었다. (중략) 당시 율산은 자금부족을 극복하기 위해 연불수출이라는 편법을 이용했다. 특히 물건을 선적하지 않고 선박회사로부터 가짜 선하증권을 만들어 은행에서 수출대금을 챙기는 소위 '선 네고' 수법으로 자금을 해결하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비극의 날이 왔습니다. 신 사장에 대한 납치사건이 1979년 1월에 벌어지고, 1978년에는 이른바 '밤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율산의 계열사인 경흥물산이 만든 기성복 브랜드 티켓을 추석선물로 돌리다 청와대의 공무원 부조리 사정작업에 걸려든 사건이었습니다. 


아무튼 여러 곡절 끝에 다음과 같은 죄목으로 신 사장이 구속되었습니다(대한민국 금융 잔혹사, e-book 171쪽). 


대기업으로 성장해 오는 과정에서 일반 융자금, 수출 융자금, 해외공사 선급금 등을 그룹 산하 계열사에 제대로 입금시키지 않고 가지급금 형식으로 변태 지출하거나, 다른 회사를 잇따라 흡수합병하거나 증자하는 데 사용하는 방법으로 지난 3년 동안 134차례에 걸쳐 회사 돈 105억원을 빼돌려 회사 자본금의 89% 자신의 개인 재산으로 만들었다.


이어 1979년 5월 6일, 율산 그룹의 전 계열사는 일괄 부도 처리에 되었습니다. 권력자와의 친소관계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시각도 많습니다만, 율산그룹의 성장과 패망은 당시 수출기업들에게 경종을 울리기에 충분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율산 비슷한 관행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번 수출 실적이 부진하다 싶으면 언제든 정리가 될 수 있다는 신호로 보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정리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5공화국 초기의 금융자율화 및 물가안정 노력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즐거운 독서, 행복한 인생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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