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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춘욱 Nov 30. 2022

대한민국 금융잔혹사 - 기업공개 촉진법 전후

액면발행 규제, 그리고 단자사 및 투신사 설립

오늘은 최근에 읽은 책 "대한민국 금융잔혹사"의 한 대목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1972년 단행된 이른바 '8.2 사채동결' 조치는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자본시장이 발달되어 있지 않은 환경에서 사채(私債)는 필요악이었는데, 이를 전격적으로 동결시킨 것이죠.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한국의 경제 위기와 극복" 63~64쪽), 


첫째, 1972년 8월 2일 현재,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사채를 일주일 내에 전부 신고하는 한편 사채의 이자율을 은행 금리 수준(연 16.2%)으로 인하하고 원금은 3년 거치 5년 분할 상환토록 하는 것이었다. (중략)

둘째, 은행 등 금융기관이 기업에 대출한 자금 중 단기성 대출금의 30%를 장기저리자금으로 대환하였다. (중략)

셋째, 은행을 이용할 수 없었던 저신용/무담보의 중소상공업자 및 농림수산업자를 위해 신용 보증제도를 마련하였다. (중략)

넷째, 산업합리화를 위한 자금 500억원을 조성하여 산업합리화 기준에 맞는 기업에게 장기저리로 대출해주었다.  


한 마디로 말해, 금리를 인하해주고 원금 상환도 유예해 준다는 것입니다. 대신, 기업들에게도 채찍을 휘둘렀습니다. 바로 기업 상장을 강제로 요구한 것이었습니다(대한민국 금융 잔혹사, e-book 143쪽). 


초법적인 초지로 일단 기업을 살려주는 대신 기업이 더 이상 개인만의 것일수 없다는 취지에서다. 기업공개로 재무구조를 개선하는 것은 물론 부의 사회환원을 통해 사회 전반의 형성을 기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에 따라 1973년 1월 기업공개촉진법이 제정되고 '우리사주제'가 도입되었다. 기업공개촉진법은 공개 권장을 넘어 대상 기업을 정부가 직접 선정하여 공개를 요구하고 불응할 경우 강력한 규제를 가한다는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공개 대상 기업을 지정, 기업 공개를 강력하게 요구하는 5.29 특별 조치를 지시했다.


그러나 재벌들은 여전히 미온적이었습니다. 5.29 조치 이후 15개월이 지나도록 전체 공개 대상 522개 기업 중 25개 만 공개가 이뤄졌습니다. 왜 기업들이 상장에 부정적이었느냐 하면, 액면발행 규제 때문이었습니다다("시장의 기억", 77~78쪽). 


당시 강제상장은 대다수 대기업그룹에 가혹한 처사였다. 투자자 보호 명목으로 공모가액 산정 때 액면가를 넘지 않도록 규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주주 지분율 51% 이하' 등 상장 요건을 맞추려면 헐값에 대규모로 주식을 팔아야 했다. 상장사에는 액면가의 10% 이상 배당을의무화해 자본 축적에도 불리했다. 1973년 1월 기업공개촉진법 시행(1972년 8·3 사채동결의 후속 조치)에도 불구하고 신규 상장이 부진했던이유다. 당시 정부는 상장을 촉진하기 위해 감세(과점주주 소유 비율이 30% 이하일 경우 주주의 배당소득세 부담 완화 등 혜택 제공) 등 다양한 '당근'을 제시했지만 제일제당(현 CJ, 1973년 상장)과 롯데칠성음료(1973년 상장) 등 소수만 체면치레로 기업을 공개하는 데 그쳤다.


여기서 액면발행이란, 주식의 액면가(통상 5천원)를 기준으로 새로운 주식을 발행하는 것을 뜻합니다. 회사의 자기자본이 쌓여 주당 순자산 가치가 1만원이더라도, 신주 발행은 액만가 기준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헐값에 주식을 상장시키고 또 지분을 투자자들에게 넘기는 일이죠. 


대신 정부는 다음과 같은 인센티브를 제공했습니다(대한민국 금융 잔혹사, e-book 144쪽).


 1973년 7월부터 대한, 동양, 중앙, 한국, 한양, 서울 등 7개 투자금융회사가 설립되었다. 일명 단자(短資) 회사라고 불린 이들은 기업들의 단기자금 공급원 역할을 했다. 1970년대 후반에는 외국인 주주들이 50% 이상 지분으로 참여한 한국, 현대, 새한, 한불, 한외, 아세아 등 6개 종합금융사가 설립되었다.

또 차입보다는 생산설비를 장기 임대해 쓸 수 있는 리스 회사도 생겨났다. 1972년 12월 산업리스를 필두로 한국개발리스, 제일시티리스 등이 잇따라 설립되었다. 서민 금융기관인 상호신용금고, 신용협동조합도 이때 생겼고 한국투자신탁(1974년), 대한투자신탁(1977년)도 이 시기에 설립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회사들은 거의 없지만, 한국 금융시장의 얼개가 짜여진 것도 이때였던 것 같습니다. 이후 삼성전자를 비롯한 한국 대표 기업들의 상장이 꾸준히 추진되면서  1972년 66곳에서 1978년 말 356곳으로 급격히 불어났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글을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율산그룹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https://brunch.co.kr/@hong8706/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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