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저리자금으로의 전환을 통해 수출 제조업의 경영수지 개선
오늘은 김두얼 교수 등이 최근 발간한 책 “한국의 경제 위기와 극복”의 제 1장 부분을 소개할까 합니다. 책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우리 경제가 겪었던 위기를 어떻게 빠져 나왔는지 살펴본 책인데.. 70년대 초반의 '8.3 사채동결 조치'는 한국 특유의 위기 극복을 가장 잘 보여주는 듯 합니다.
먼저 사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57~58쪽).
금융기관이 대출 장벽을 높이자, 당장의 운용자금 확보를 위해 기업이 찾은 것은 비은행권, 고리사채였다. 사채 이자율이 높아지자 자금의 여유가 있는 기업도 투자를 하거나 사내유보를 통한 향후 대비와 운용자금을 자체 조달하기보다는, 고리대금업을 통한 이자수입 확보로 기업자금을 유용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사업체 대표가 개인자격으로 채권자가 되고, 사업체의 재무제표에는 차입으로 기재하는 방식으로 법인세를 회피하고 유사 고리대금업을 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자기 회사에게 대주주가 돈 놀이 하는 일이 일반적인 시절이었습니다. 조금 더 인용해보겠습니다(58쪽).
한국은행은 1960년대부터 사금융실태를 조사하고 있었는데, 1970년대 초에도 대부분이 사채를 이용하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1971년 조사대상기업의 90% 이상이 월평균 4% 정도의 금리로 사채를 이용하고 있었다. 이용기간은 3개월 이하의 단기였고, 연리 기준으로 보면 50% 이상의 고리 이용자가 대부분이었는데, 차입기간과 신용도에 따라 다양한 이자율이 적용되고 있었다. 사금융시장은 무담보로 신속하게 기간별로 다양한 조건의 자금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더욱 번창하였다. 은행 대출금리는 1971년 현재 보통은행 22%, 산업은행 운영자금 18%였으나, 진입장벽이 높고 담보와 신용이 필요했으며 이용자도 극히 제한적이었다.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은행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는 것은 마이너스 금리를 이용하는 특혜였기 때문에 정부의 정책금융 대상자가 아니면 접근조차 어려웠다. 대부분 시설자금에 한한 것이어서 단기 운용자금의 대출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수출 대기업들에게만 낮은 금리 대출이 가능했고, 대부분은 연 48% 레벨의 사채를 이용해야 했던 것 같습니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당시 한국 정부가 강력한 파워를 지니고 있었던 것은 결국 '정책자금'을 기업에게 뿌려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
출처: 김두얼 등(2017), “한국의 경제 위기와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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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예금 이자가 기껏해야 20%에 불과한데, 사채 이자는 그 2배를 훨씬 넘으니.. 돈을 가진 이들은 사채를 굴리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습니다(책 59~61쪽).
예금자 입장에서 보면, 사채시장을 활용하면 은행이자율의 2배 이상의 수익률을 얻을 수 있었다. 기업의 총자본이익률이 1% 이하로까지 하락하고, 자본시장이 미발달하여 안정적인 배당수익률을 기대할 수 없었던 1970년대 초에는 저축자금을 고리사채로 운용하는 것이 가장 수익이 높고 안정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8·3조치에서 신고된 채권자의 30% 이상이 기업의 주주나, 중역으로, 이른바 위장 사채였다.
기업이 은행에 예치한 저축성 예금도 순수예금이 아니라, 예금을 담보로 대출을 받기 위한 용도가 대부분이었다. (중략) 정부는 대깅버들이 상품의 원가계산을 허위로 기재하고, 적자를 본 것처럼 위장한 상태에서 자금을 빼돌려 다른 곳에 전용하고 있음을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중략) 이런 자금의 고리사채로의 이전을 조장한 것은 오히려 은행이었다. 은행이 사채액을 융자로 전환하여 예금고로 높이는 브로커 역할을 하거나, 위장사채를 활용한 탈세 문제도 빈번하였다.
70년대 초반 경기 여건이 악화되는 가운데 정부는 “8·3 조치”를 단행했는데,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았습니다(63~64쪽).
첫째, 1972년 8월 2일 현재,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사채를 일주일 내에 전부 신고하는 한편 사채의 이자율을 은행 금리 수준(연 16.2%)으로 인하하고 원금은 3년 거치 5년 분할 상환토록 하는 것이었다. (중략)
둘째, 은행 등 금융기관이 기업에 대출한 자금 중 단기성 대출금의 30%를 장기저리자금으로 대환하였다. (중략)
셋째, 은행을 이용할 수 없었던 저신용/무담보의 중소상공업자 및 농림수산업자를 위해 신용 보증제도를 마련하였다. (중략)
넷째, 산업합리화를 위한 자금 500억원을 조성하여 산업합리화 기준에 맞는 기업에게 장기저리로 대출해주었다.
사채의 신고는 채무자인 기업과 사채권자 또는 중개인이 관할세무서나 금융기관을 방문하는 식으로 이뤄졌는데, 신고를 하면 사채 신고필증을 발부했다고 합니다. 신고된 사채는 원금과 지급되지 않은 이자를 합산한 금액을 3년 거치 이후 5년에 걸쳐 6개월마다 나눠 갚았습니다. 매월 갚아야 하는 이자는 월리 1.35%(연리 16.2%)를 초과할 수 없었습니다.
돈을 빌려간 기업들에게 엄청난 특혜가 주어졌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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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사업체 대표가 사업체에게 자금을 빌려주고, 그 이자를 기업회계에서 지출하게 하는 위장 사채가 대거 드러났습니다. 이에 대해 정부는 사채를 출자로 전환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즉, 채권을 주식으로 바꾸게 강제했죠.
사업체 대표가 기업을 도산시키고 부실화의 위험에서 도피하는 것을 차단하고, 지분 가치만큼의 손실을 함께 보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국세청은 1972년 상반기 징수된 세액을 근거로 역추산해 볼 때, 기업의 사채 이용 규모는 약 1,150억원 규모에 이른다고 보고한 바 있습니다. 이것은 추정에 불과할 뿐, 실제로는 훨씬 더 클 것이라는 게 국세청의 주장이었죠.
'긴급명령 22조'에는 사채권자가 과점주주인 경우에는 90일 이내에 사채를 전액 출자로 전환하도록 하였습니다(69쪽).
과점 주주란 '출자자 혹은 그와 특수관계에 있는 자로서 출자액의 합계액이 1인 50% 이상, 2인인 경우 60% 이상, 3인인 경우 70% 이상을 점유하는 자'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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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채의 조정과정을 통해 기업사채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획기적 성과라 할 수 있습니다(70~71쪽).
1972년 8월 3일부터 9일까지 채권자는 21만 906건의 3,571억 원, 채무기업은 40,677건 3,456억 원을 신고하였다. 채무기업에 비하여 채권자의 신고가 5.18배나 많은 것은 평균 5명 이상의 채권자에게 차입하였다고 볼 수 있다." 신고된 사채규모는 1972년 6월 말 현재 금융기관 매출잔액 1조 2,209억원의 28.3%, 통화량 3,805억원의 90.7%, 은행 저축성 예금의 30%, 대출 총액의 25% 규모였다.
표본 조사로 확인된 것으로도 제조업 기업의 50% 이상이 사채를 사용하고 있었다. 소액 사채는 신고되지 않고 영업 감찰이 없었음을 감안하면, 기업 사채 규모는 예금은행 여신 잔액의 50% 이상, 5천억 이상으로까지 추정된다.
한가지 더 특이한 일은 정부가 '장기저리 자금 2천억원'을 지원하기로 했지만, 신청이 대단히 저조했다고 합니다(77쪽).
상당히 유리한 조건으로의 이자경감과 상환기간 조정이 이뤄지기에 신청이 쇄도할 줄 알았지만, 신청액이 지원액 2천억원에 미치는 1,200억원에 불과했다. (중략) 기준 대출금으로 보고된 기업체와 실제 차입자가 일치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업체의 실제 차주가 명의만 빌려준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개인이 친분이 있는 기업체 명의를 빌려 은행 차입을 하거나, 금융기관이 개인에 대한 소비성 자금 소액 대출을 기업에 대한 대출로 위장처리 했기 때문이었다.
출처: 김두얼 등(2017년), “한국의 경제 위기와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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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8.3' 조치의 성과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책의 89쪽에 제시된 <표>에 나타난 바와 같이, 5년간 금융비용 절감 효과가 2,583억원에 달했습니다. 은행권 금리를 19%에서 단계적으로 16%까지 인하한 효과가 2,848억원, 그리고 특별금융조치로 인한 경감 효과는 715억이라고 하네요.
이자율이 이렇게 떨어지니, 기업들의 재무구조도 크게 개선되었습니다(94쪽). 특히 제조업의 자기자본비율이 크게 개선되어, 금속제품/기계및장비제조업은 전년 17.4%에서 26.9%로, 제재및가구제조업은 9.1%에서 15.4%로 상승했습니다. 특히 자기자본비율 중에서도 주식 보유비율이 증가했는데, 이는 출자전환의 효과가 크게 반영되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금융기관을 이용할 수 있는 기업들은 '8.3' 조치 효과를 크게 보았지만, 사채시장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중소기업 및 자영업자들은 사채시장이 경색되며 오히려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평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