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준의 금리인상으로 멕시코와 브라질이 무너졌지만.. 한국이 건재했던 이유
지난 시간에는 1972년 '8.2 사채동결조치'에 대해 살펴보았으니, 오늘은 80년대 초반의 외채위기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혹시 지난 번 글을 못 본 분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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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반, 미 연준이 공격적인 금리인상을 단행하면서 세계 신흥국은 끔찍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정책금리가 한 때 20%까지, 그리고 10년 만기 국채 금리가 15%선을 넘어서면서 달러로 대출을 받은 나라들은 엄청난 이자부담을 져야 했습니다. 더 나아가, 이자율이 이렇게 높아지며 달러의 가치도 상승해 주요국 환율이 급등해 원리금 상환 부담도 커졌죠.
<그림> 1960년 이후 미국 정책금리(파란선)와 10년 만기 국채금리(붉은선) 추이
이 문제는 한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60년대 초까지는 외자 도입 대부분이 무상이었지만, 이후 이자 및 원리금 지급 부담을 지는 외채가 주종을 이뤘죠. 1979년까지 외채 도입 누계는 263.4억 달러에 이르렀으며, 상환액은 60.6억 달러이고 잔액은 202.8억 달러였습니다. 1979년 한국 수출액이 150.6억 달러였으니, 외채 부담이 상당히 과도했죠(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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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초반까지 한국은 외채 문제가 심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일쇼크를 겪으면서부터 한국의 외채가 조금씩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습니다(129쪽). 국내총생산 대비 외채 잔액의 비율이 1974년 23.3%에서 1981년에는 28.6%로 높아졌고, 외채 상환비율도 10.3%에서 12.3%로 소폭이지만 올라갔죠.
물론 다른 나라에 비해 한국의 외채 상황은 아주 건전한 편이었습니다. 브라질이나 멕시코 등 남미 국가는 GDP 대비 외채 규모도 급증했고, 외채 상환비율도 가파르게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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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채가 급증한 것은 오일쇼크로 인한 경상수지의 악화 뿐만 아니라, 외채의 금리가 국내에 비해 매우 낮았던 탓도 큽니다(146쪽). 1980년대 초반, 미국이 정책금리를 인상하기 이전만 해도 외채 금리는 한국 국내 금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 1971~1975년 국내 은행 대출금리는 17.4% 장외시장금리는 40.1%에 달했습니다만.. 국외금리는 7.9%에 불과했죠. 그러나 연준의 공격적인 금리인상이 단행된 1981~1983년에는 문제가 달라졌습니다. 국내 은행대출금리는 13.8%인 반면, 국외 금리는 13.0%까지 상승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의 절하(가치 하락)를 감안하면, 해외에서 돈 빌려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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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의 차입이 막히면, 대안은 국내저축 밖에 없습니다. 다행히 이 문제는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이 주도했던 강력한 인플레 억제 대책으로 풀 수 있었습니다("대한민국 금융잔혹사3 - 80년대 초의 금융자유화 정책"). 인플레 압력이 약화되며 실질금리가 높아지자, 자연스럽게 저축률이 높아졌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을 1979년 482원에서 1981년 681원까지 인상한 것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159쪽, 1980년 '1.12 조치). 환율의 급격한 인상으로 1980년 물가는 급등했지만, 대신 기업들의 경쟁력이 회복되었던 것입니다. 이 영향으로 경상수지의 적자규모가 줄어들고 해외의 평가가 개선될 수 있었죠. 따라서 다른 나라들이 연쇄적인 외채위기를 겪는 중에도 한국의 투자는 꾸준히 늘어났고, 1985년부터 시작된 이른바 '3저 호황'을 맞아 화려한 불꽃을 태울 수 있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출처: 한국의 장기통계: 국민계정 1911-2010, 한국은행 경제통계정보 시스템.
출처: 한국의 장기통계: 국민계정 1911-2010, 한국은행 경제통계정보 시스템.
출처: “한국의 경제 위기와 극복”. 17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