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민영화와 금리인하, 인플레 억제 대책
최근 읽은 흥미로운 책 "대한민국 금융잔혹사"에서 80년대 초반의 물가안정대책 및 금융자유화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혹시 지난 번 글을 읽지 않은 분들은 아래 링크 글을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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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12 쿠데타와 1980년 봄 광주학살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의 최대 과제는 물가안정이었습니다. 특히 1980년은 냉해를 입으며 농축수산물 생산이 급격히 감소한 데다, 2차 오일쇼크로 인플레 압력도 다시 높아졌죠. 한 마디로 '저성장/저물가'의 스태그플레이션 상황이 출현한 것입니다.
출처: 한국의 장기통계: 국민계정 1911-2010, 한국은행 경제통계정보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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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성도 없고 경제성과도 처참한 전후환 정부는 무엇이든 해야 했습니다. 이때, 나타난 인물이 김재익 경제수석이었습니다. 그는 강력한 긴축정책을 펼쳐 인플레를 잡는 것이 곧 경제를 살리는 길이라고 대통령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습니다(e-book 185쪽).
김 수석의 주도 아래 경제기획원은 1981년 5월부터 대통령에게 매주 한 차례씩 10회에 걸쳐 제5차 경제사회발전계획을 특별 프리핑했다. (중략) 이 보고서의 기본 인식은 성장 위주의 양적 팽창 정책에 따른 고질적인 인플레 구조가 여러 문제를 야기하고 있으므로 과감한 정책 전환이 있어야만 경제발전이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수출 지원 축소, 실질금리 보장, 수입자유화 확대, 정책금융 축소, 재정개혁, 중화학공업 지원제도 재검토, 이중곡가제 폐지 등 민감한 사안이 포함되었다.
이게 한국경제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981년부터 인플레가 잡히기 시작해, 1982년에는 인플레율이 6.1%까지 낮아졌죠(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4%). 인플레 압력이 낮아지자, 금리인하가 가능해졌습니다(e-book 185쪽).
물가안정은 '6.28' 금리인하 조치의 배경이 되었다. 1982년 6월 28일 은행 금리를 14%에서 10%로 내린 것은 철저히 청와대가 주도한 작품이었다. (중략) 금리인하 조치는 금융자율화의 기반을 성과를 거두었다. 시장금리가 인하되면서 종래의 정책금융(10%) 효과가 퇴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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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금융개혁은 여기까지로 끝나고 말았습니다(e-book 187쪽).
(금리인하에 이은) 2탄은 금융실명제 실시 발표였다. 7월 3일의 '사채 양성화와 관련한 실명거래제 실시와 종합소득세 개편 방안'이다. 3탄은 7월 28일 발표된 '제2금융권 활성화 대책'으로 사채시장 양성화를 위해 단자회사 및 상호신용금고 설립을 무제한 허용하고 아룰러 자금출처조사도 면제해주었다.
좋은 일이었습니다만, 실행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e-book 190쪽).
단자회사와 신용금고의 신규설립은 큰 특혜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기준에만 맞으면 무제한 신규 설립을 해준 것은 일대 사건이었다. '7.28' 조치 발표 이후 몇 달 사이에 단자회사는 12개가 설립인가를 받아 기존 20개에서 32개로 늘어났다. (중략) 국회에서 금융실명제 연기를 논의하고 있을 즈음, 상속회 회피 및 과당경쟁 등의 이유를 들어 신규 허가를 중단할 것을 건의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서울지역 단자회사 무제한 신규설립 허가는 반면을 못가서 중단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은행 자율화 정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형식적인 민영화일 뿐, 은행은 여전히 정부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1983년 아웅산 폭탄테러로 김재익 수석 등 핵심 관료들이 희생 당하면서, 다시 정부 주도의 관치 경제로 돌아가고 말았죠.
그러나 물가안정에 주력한 새로운 정책기조, 그리고 정부가 사사건건 모든 일에 간섭하는 과거의 시스템을 버려야 할 때가 되었다는 지적은 이후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