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완화와 모럴해저드의 이중주
오늘은 최근 읽은 책 "시장의 기억"에 대한 8번째 서평입니다. 이번에는 2011년 금융시장에 큰 충격을 가했던, 부산 저축은행 사태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혹시 지난 편 글을 못 본 분들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시장의 기억6 - 대우그룹 부도와 투신사 환매중단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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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증권파동부터 2011년 부산저축은행 사태까지, 한국의 금융시스템에 바람 잘 날이 없었습니다. 특히 2011년 부산저축은행 사태는 피해자의 숫자(10만 명 이상)도 엄청났을 뿐만 아니라 손실 규모 면에서도 역대급 사건이라 하겠습니다(345쪽)
국내 저축은행업계 1위 그룹에서 불붙은 대량인출사태(뱅크런)는 정상영업을 하던 90여 개 다른 저축은행으로 전염병처럼 번져나갔다. 저축은행중앙회에 따르면 2010년 말 사상 최대인 76조 원에 달했던 예금 가운데 32조 원이 2012년까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이 기간 20여 곳의 저축은행이 셔터를 내렸고, 약 10만 명의 피해자가 발생했다. 뒤이어 예금보험공사는 2015년까지 무려 27조 원으로 불어나는 공적자금 투입에 들어간다. 역사상 최대 금융비리 수사로이어지는 '저축은행 사태'의 시작이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저축은행 사태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345~346쪽).
1936년 일제가 공포한 조선무진업령에 따르면 무진업은 '정기적으로 곗돈을 부은 뒤 추첨 또는 입찰 방식으로 목돈을 빌려주는 거래'였다. 돈을 벌 목적으로 회사가 계주를 전담한다는 점을 빼면 전통적인 상호신용계와 비슷했다. 매일시장을 돌며 소상공인에게 본전과 이자를 거둬들이는 일수업을 병행하기도 했다.
무진회사는 정부가 한국·중앙무진 등을 모태로 1962년 서민금융을 전담하는 국민은행(현재의 KB국민은행)을 발족하고 조선무진업령을 폐지하면서 일시적으로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 공업화로 서민금융 수요가 급팽창하자 다시 무허가 사설 업체가 난립했다. 각종 금융 사고와 고리대금업 폐해가 잇따르자 박정희 정부는 1972년 8·3 사채동결 조치'와 더불어 '상호신용금고법'을 시행했다. 이 법에 따라 350곳의 무진회사가 1973년 3월까지 한꺼번에 정부 통제를 받는 상호신용금고로 변신했다. 오늘날 애큐온저축은행(삼아무진), DB저축은행(동부무진), 민국저축은행(민국상호무진) 등 상당수가 이 시기 사업을 개시했다.
정부는 가급적 많은 무진회사를 양성화하려 '이자제한법' 적용을 배제하는 혜택을 제공했다. 대신 친숙한 지역 소상공인에게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라는 취지에서 '단일 점포 유지'와 '소액대출만 취급' 같은 족쇄를 채웠다. 이 족쇄는 훗날 단계적으로 모두 풀려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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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8.3' 조치가 참 많은 것을 바꾸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정부가 상호신용금고에게 예금과 대출을 허락해주면서, 산업의 본격적인 발전이 시작되었습니다(347쪽).
상호신용금고로 다시 태어난 무진회사들은 각종 규제 완화에 힘입어 짧은 기간에 준 은행으로 변신하는 과정을 거쳤다. 대출 재원 마련에어려움을 겪던 1976년에는 적금과 비슷한 '상호신용부금'의 취급을 허가받았다. 5년 뒤에는 정부의 서민금융 활성화 정책에 따라 보통예금 성격의 '신용부금가입자 예수금' 판매 창구를 열었다.
적금과 예금의 허용은 상호신용금고의 고속성장에 '날개'를 달아줬다. 금고업계 수신총액은 1980년 2,796억 원에서 1989년 22배인 6조2,033억 원으로 폭증했다. 정부의 저금리 정책에 묶인 시중은행보다 매력적인 금리를 제시한 덕분이었다. 애초에 상호신용금고제도의도입 취지였던 기본 업무인 상호신용계는 반대로 급격히 쇠퇴했다.
90년대 부모님이 집을 구입할 때, 상호신용금고에서 대출을 받았던 기억이 선명하네요. 그리고 외환위기가 상호신용금고에게 날개를 달아주었습니다(347~348쪽).
또 한 차례의 전환점은 1990년대 후반 업태의 궤멸 위기와 함께 찾아왔다. 금리 자유화에 따른 은행 등과의 경쟁 격화, 외환위기로 인한대출 부실화가 겹치면서 전국 본점 수가 1998년 211곳에서 2002년116곳으로 반 토막 난 때였다. 정부는 존폐의 기로에 선 서민금융산업을 살린다는 취지로 '단일 점포’ 주의를 단계적으로 완화했다. 2002년엔 업계의 강력한 요구를 수용해 '사금고'를 연상케 하는 기존이름을 지우고 '상호저축은행' 간판을 올릴 수 있도록 허용했다.
2005년 노무현 정부의 '제로베이스 금융규제 개혁 방안'은 마지막 족쇄였던 대출 제한까지 푸는 결과로 이어진다. 정부는 이 방안에 기초해 2006년부터 이른바 '8·8클럽 (자기자본비율 8% 이상, 고정이하여신 8% 이하) 50여 곳에 대규모 단일대출(80억 원 이상)을 허용했다. 상호저축은행에 은행과 비슷한 지위를 부여한 이 같은 일련의 규제완화는 훗날 지배구조 특성을 과소평가한 실책이었다는 비판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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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 '저축은행'으로 바꾸고, 대출제한도 풀리니 이제는 본격적인 성장만 남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급격한 성장에는 항상 뒤탈이 따르는 법. 드디어 PF 대출이 시작되었습니다(348~349쪽).
은행의 역할을 갖춘 대형 상호저축은행은 유상증자와 후순위채 발행자금으로 자본을 늘리며 공격적으로 사세를 불리기 시작했다. 시중은행과 달리 지배주주가 존재하는 저축은행은 위험 감수에 따른 성장의 과실이 고스란히 대주주 일가의 몫으로 돌아가는 구조다. 상호저축은행이란 간판에서 '상호'마저 떼면서 옛 이름을 완전히 지운 260 이듬해인 2011년 3월 말, 자산총액 1조 원 이상 되는 16곳의 최대주주(특수관계인 포함) 지분율은 평균 73%에 달했다.
부동산시장이 뜨겁게 달아오르던 2000년대 중반부터는 건물을 올리는 시행사 대출을 과감하게 늘리는 '도박'에 뛰어들었다. 대부분 서류상 회사인 시행사는 원리금 상환 여력을 갖추지 못한 대가로 연 10%대의 높은 이자를 지급했다. 건물의 분양 성과가 나오면 시중은행 대출로 갈아타면서 기존 저축은행 대출을 갚았다. PF 대출 잔액이 6조 원을 넘어선 2005 회계연도 저축은행들은 전년보다 190% 늘어난 6,746억 원의 순이익을 올렸다. 평균 자기자본순이익률ROE 40% 수준에 달했다. 이듬해에도 7,000억 원대 순이익을 만끽했다.
신이 난 대주주들은 경쟁사를 사들이고 PF 대출을 더욱 확대하는등 저축은행을 사금고처럼 운영했다. 저축은행 사태의 핵심이었던부산저축은행은 중앙저축은행(2006년) 등을 인수해 5개 계열사를 거느리며 지방은행과 경쟁했다. 솔로몬(현 NH저축은행)은 나라(2006년)·한진저축은행(2007년) 등을 인수했다. 한국저축은행은 부민(2007년),현대스위스는 예한울(2009년)을 사들였다.
부동산 호황이 정점에 이르렀던 2007년 저축은행 PF 대출은 12조원으로 부풀어 있었다. 건설업체 대출을 포함하는 부동산 관련 여신비중은 전체의 50%로 '올인'에 가까웠다. 이듬해 터진 글로벌 금융위기로 대부분 사업장이 장기간 공터로 남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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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2008년, 저축은행들의 문제가 서서히 불거지기 시작했습니다(349~350쪽).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부동산시장이 혹한기에 접어들었던 2011년초. 저축은행의 PF 사업장 전수조사 결과를 받아든 금융당국은 경악했다. 당시까지 남아 있던 전체 7조 299억 원의 대출 가운데 절반인 3조 3,601억 원이 '부실 우려' 사업장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금융위원회는 2011년 1월 경영 부실을 이유로 가장 먼저 삼화저축은행에 영업정지 명령을 내렸다. 다음달 17일에는 부산·대전저축 은행의 셔터를 내렸다. 부산저축은행 관계사를 중심으로 뱅크런이 본격화하자 토요일인 2월 19일 긴급회의를 열고 추가로 부산2저축은행 등 4곳의 영업정지를 발표했다. 놀란 가슴을 쥐고 영업장을 찾은예금자들은 셔터에 붙은 영업정지 안내문을 확인하고 망연자실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악순환이 시작되었습니다. 경영상태에 대한 의문이 부각되는 저축은행을 중심으로 뱅크런이 확산되었죠(350쪽).
뱅크런은 저축은행산업 전체로 빠르게 확산했다. 곳곳에서 현금창고가 바닥을 드러냈고 '신용질서 유지' 명목을 내건 금융위원회의 영업정지 조치가 뒤따랐다. 2011년 여름에는 10곳, 이듬해에는 솔로몬저축은행을 포함해 한국·미래 · 한주저축은행 등 8곳이 문을 닫았다.
금융감독원은 2012년 10월 집계 기준 예금자 피해 금액을 5,000만원 초과 예금 5,131억 원, 저축은행 후순위 채권 투자손실 8,571억 원으로 추산했다.
검찰이 부실 저축은행의 장부를 뒤지자,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현실에 맞딱뜨렸습니다(350~351쪽).
검찰은 곧바로 저축은행 비리 수사에 들어갔다. 역대 최대인 130여 명의 인력을 투입해 2011년 3월부터 8개월간 수사한 결과 부산저축은행그룹의 6조 원대 불법대출 혐의를 적발했다. 금융감독원, 국세청등 정·관계를 대상으로 이뤄진 광범위한 로비 사실도 밝혀냈다. 영업정지 직전 주요 고객 및 임직원의 친인척에게 예금인출 특혜를 제공한정황까지 포착했다. 이 같은 불법 행위는 뒤이어 영업정지와 정리 절차를 마친 솔로몬과 현대스위스, 토마토저축은행 등에서도 만연한 것으로 드러났다. (중략)
저축은행 예금자는 2012년 말 337만 명으로 줄어, 2년 만에 89만 명이 빠져나갔다. 예금보험공사는 2011년부터 2015년까지 총 27조 2천억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해 31개 저축은행을 정리했다.
이른바 '하우스푸어' 사태가 발생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주택시장의 불황 때문이겠습니다만, 저축은행 사태를 계기로 신용경색 현상이 나타난 것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국은행이 신속하게 금리를 인하했지만, 시장금리의 급등세는 2012년 말까지 지속되었죠. 그리고 2013년 발생한 동양증권 사태로 이번에는 기업어음(CP) 시장마저 망가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