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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춘욱 Dec 03. 2022

시장의 기억3 - 80년대의 대세상승 이야기

국민주 상장과 깡통계좌 정리 

오늘은 최근 읽은 책 "시장의 기억"에 대한 세 번째 서평입니다. 이번에는 80년대의 대세상승에 대해 인상적인 부분 위주로 인용하겠습니다. 혹시 지난 편 글을 못 본 분들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시장의 기억 - '5.29 강제 상장 조치' 이야기

시장의 기억2 - 1962년 증권 파동 이야기


***


1985년 9월의 프라자 합의, 1984년부터 시작된 국제유가 폭락, 그리고 미 연준의 금리인하 등 이른바 '3저 현상'이 출현하면서 한국 주식시장은 폭등하기 시작했습니다. 1985년 한 해 동안의 주식 거래대금은 7조원에 불과했지만, 1989년에는 86조원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기업들은 자기 몫을 챙기기 시작했죠(책 120쪽). 


기업들은 앞다퉈 새 주식을 찍어 일반에 공모하면서 자본시장으로 흘러드는 자금을 흡수했다. 1985년 342개였던 상장회사 수는 1988년 500개를 돌파했고, 유상증자 금액은 같은 기간 2,590억 원에서 6조 7,210억 원으로 26배 증가했다. 1989년 유상증자 대금은 11조 1,245억 원으로 사상 처음 10조 원을 넘어섰다.


2021년에 벌어졌던 일이 1985~1989년에도 그대로 반복된 셈입니다. 주가가 오르기만 하면 증자와 신규상장이 급증하고, 이게 시장의 수급 균형을 무너뜨리는 일은 한국증시의 특성이라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부도 이 기회를 놓치려 들지 않았습니다(책 120쪽).


정부도 증시 활황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1987년 12월 대선 승리 직후 소득 중위계층 이하 국민 대상의 '국민주 개발·보급 계획'을 발표했다. 민정당 총재 시절 대선 공약이었던 국민주 보급은 1988년 4월 포항종합제철(포스코)을 시작으로 이듬해 한국전력 기업공개로 이어졌다. 국민주 보급에 힘입어 주식 거래 인구는 1985년 77만 명에서 1989년 전체 인구의 절반(45%)에 가까운 1,901만 명으로 급증했다. 

'주식은 사두면 오른다'는 믿음이 갈수록 더 많은 투자자를 시장으로 끌어들였고 시장은 대량으로 쏟아지는 신주 물량까지 모두 소화해냈다. 신바람 난 증권사들은 경쟁적으로 융자 서비스를 내놓으면서 현금의 2~3배까지 주식을 사도록 부추겼다. 


***


2022년 초와 어쩜 그렇게 비슷한지 모르겠습니다. 주식공급확대에 레버리지 투자 증가의 귀결은 버블의 붕괴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책 120~122쪽).


코스피지수는 1989년 3월 31일 마침내 1,000.31로 거래를 마쳐 대망의 1,000선을 돌파했다. 1985년 초 139포인트에서 불과 4년 만에 달성한 대기록이었다. 주가 수준을 나타내는 주가수익비율(PER: 시가총액/순이익)은 6배에서 14배로 올라 있었다. 이제 문제는 국민의 절반이 빚을 내어 고가에 매입한 주식을 누가 더 떠받쳐줄 수 있느냐였다.

주식시장은 예상보다 빠르고 더 잔인하게 무너졌다. 코스피지수 1,000 돌파 전부터 증시 주변에는 많은 불안 요인이 잠복해 있었다. 1987년에 일어난 6월민주항쟁은 사상 최대 노사분규를 촉발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한 임금과 물가의 상승은 기업 실적을 짓눌렀다. (중략) 미국은 1988년 한국과 대만을 첫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했고, 절상 압력은 1989년 조지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에도 계속됐다.


주가 폭락에 한국정부도 떠밀리듯 나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유명한 증시안정기금의 출현이 그것입니다(122~123쪽).


과도한 증자와 국민주 공모도 공급 과잉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코스피지수는 1989년 4월 1일 1007을 고점으로 하락하기 시작해 1년 반만인 1990년 9월 17일 566포인트(-43%)까지 하락했다. 증권사들로부터 빚을 내 주식을 사들인 투자자들의 악성 매물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증권사가 담보 가치를 밑도는 주식을 보유한 '깡통계좌' 고객의 주식을 강제로 팔아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반대매매는 주가를 더 크게 떨어뜨려 새로운 깡통계좌를 만들어내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국민주를 산 개인투자자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재무부는 1989년 말 "한국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해서라도 증시를 안정시키겠다(12·12조치).”라고 호언했지만 한국은행과의 마찰로 결국 허언에 그쳤다.

재무부는 고민 끝에 1990년 5월 4조 원의 '증시안정기금조성을 골자로 하는 특단의 증시 안정 대책을 발표한다. 일본의 사례를 본떠 만든 증안기금 출자에는 증권사, 은행, 보험, 상장회사가 참여했다. 이 기금은 그해 10월 10일 980억 원 규모의 깡통계좌 매물을 동시호가로 일괄 매입했다. 증시 회복의 걸림로 잠재해 있는 악성 매물을 한꺼번에 제거하는 대수술이었다.


증안기금은 이후 두고두고 증시의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되었죠. 주가가 오르기만 하면 매물이 출회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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