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배 상승했다 폭락한 대한증권거래소 주식
오늘은 최근 읽은 책 "시장의 기억"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 위주로 말씀드릴까 합니다. 혹시 이전 글을 못 본 분들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이 책은 한국 주식시장의 역사를 사건 중심으로 다루고 있는데, 1962년 증권 파동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당시 증권파동의 핵심은 대한증권거래소의 주식회사 전환과 유상증자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책 53쪽)
대중주(대한증권거래소 주식) 가격이 꿈틀대기 시작한 것은 1962년 1월 증권거래법 공포를 수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자본시장 활성화를 위해 제정한 이 법은 '거래소를 주식회사로 전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정부의 강한 통제(이때까지 거래소는 일제강점기 법령에 기초한 특수법인이었음)를 받아온 거래소에 자유로운 영리 추구를 허용하는 파격적인 결정이자, 앞으로 벌어질 비극의 씨앗이었다.
증권시장을 부양하기 위한 노력이 왜 비극의 씨앗이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주가가 (누군가가 흘린) 풍문 속에서 80배 이상 상승했기 때문입니다(책 54쪽).
자본시장 성장의 수혜를 한 몸에 받을 수 있다는 기대는 이전까지 액면가(50전) 아래서 힘을 못 쓰던 대중주 시세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대증주는 1961년 11월에 주당 50전을 뛰어넘더니 이듬해 1월 증권거래법 통과 직후 1환(100전)을 돌파했다. 3월에는 9환대로 치솟았고 4월에는 액면가의 무려 80배를 웃도는 최고 42환대로 폭등한다.
이 정도가 되면 투자의 대상이 아닌, 신앙의 대상이 된 셈입니다. 새로운 투자자들이 시장에 유입되면서 거래대금도 폭발했습니다.
대증주 투자로 하루아침에 돈방석에 앉았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전국을 휩쓸었다. 불과 10개 남짓한 종목을 거래하는 주식시장은 끓는 가마솥으로 변했다. 한국전력과 한국증권금융의 주식이 '광에 동참했고 거래대금(약정대금)은 매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1962년 5월 거래소의 1개월 거래대금은 무려 2,520억 환(2019년 기준가치로 약 1조 8,000억 원) 12에 달했다. 1956년 거래소 개설 이후 전년도까지 6년간 누적 거래대금과 맞먹는 규모였다.
그러나 제도가 제대로 완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의 거래대금 폭발은 새로운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주식 거래 폭증의 불똥은 엉뚱하게도 '잔칫집' 거래소의 현금 창고로 튀었다. 매수대금을 나중에 지불하겠다는 '이연결제' 규모가 갑작스럽게 늘면서 매도자에게 현금을 내줘야 하는 거래소가 유동성 위기에 내몰린 것이다. 당시 거래는 익일 결제가 원칙이었지만 이연료만 내면 대금 납입을 최장 2개월까지 늦출 수 있었다.
혼비백산한 거래소는 80억 주의 대규모 유상증자 계획을 전격 발표했다. 이 중 9억 9,000만 주는 5월 25~29일 일반인을 대상으로 공모하기로 결의했다. 공모가액은 액면가의 29배에 달하는 주당 14환 50전이었다. 비록 시세보다는 다소 낮았지만, 위험천만한 ‘폭탄 돌리기'라며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돈벌이에 눈이 먼 거래소와 주주사(증권사들은 귀를 닫아버렸다.
드디어 유상증자가 나왔군요. 유상증자가 시장의 '고점'이 되는 징크스는 이 때부터가 시작이 되었습니다(책 55쪽).
유상증자 청약 성공과 더불어 대증주 거래량이 정점에 달했던 1962년 5월의 어느 날 거래소 입회장, 시장 담당 직원이 거래 시작을알리는 딱딱이를 내리치자 입회 대리인들의 고함이 강당을 뒤흔들었다. 머리 위로 치켜든 수십 개의 손가락이 현란하게 움직이며 대증주매물을 홍수처럼 쏟아내기 시작했다.
숨 쉴 틈 없이 손가락을 접었다 펴며 물랑을 받아내던 일흥증권 대리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결국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현장에 있던 100여 명의 대리인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라고 직감했다.
일흥증권은 통일증권, 동명증권 등과 함께 거래소 지분의 과반을 확보한 매점 세력이었다. 대증주 폭등으로 기세등등해진 이들은 유상증자 청약 기간에도 시세를 떠받치기 위해 매수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금이 바닥났다'는 첩보를 입수한 경쟁사들이 연일 맹공(=공매도)을 퍼붓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입회장 실신 사건은 매도 세력이 벌인 '대역전극'의 절정이었던 셈이다.
대증주를 모두 집어삼킬 것처럼 매물을 받고 또 받던 세 증권사는결국 5월 31일 결제대금 580억 환 가운데 무려 352억 환을 마련하지 못해 매도 세력에 무릎을 꿇고 만다
증자로 공급된 주식 물량이 늘었는데, 시세가 유지되기 어렵죠. 특히 이 때 상상하기 어려운 이상한 제도가 공매도를 더욱 부추겼다고 합니다(책 55~56쪽).
훗날 윤응상 일흥증권 사장의 회고(1981년 중앙일보 게재)에 따르면 전세 대역전의 결정적 계기는1962년 5월 중순 거래소가 내린 '매도자의 정산차금 납입 면제' 결정이었다. 당시 거래소는 매도 증권사들의 파산을 염려해 대증주가 더올라도 증거금 추가납입을 면제했다. “사실상 무제한 공매도의 길을 터준 셈”이었다고 윤 사장은 표현했다.
지금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던 셈입니다. 결국 주식시장이 문을 닫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책 56~57쪽)
사태 수습에 나선 거래소는 정부의 긴급 자금을 수혈받아 5월 (거래대금) 결제를 완료하고, 6월분은 전면 해합(쌍방 합의로 매매계약 해지)이라는 비상수단으로 틀어막았다. 하지만 극심한 혼란과 불안은 가라앉지 않았다.거래소는 정부의 화폐개혁(1962년 6월 10일에 10환을 1원으로 바꾸는 개혁을 단행) 등을 핑계로 2차례 휴장한 뒤 7월 13일 문을 열었지만, 8월말 태양증권의 결제 불이행 사태로 또다시 문을 닫아야 했다. 그해 말에도 증시 안정을 명목으로 폐장과 재개장을 반복하더니 1963년 2월25일부터는 무려 73일 동안 문을 열지 못했다. 대증주 폭락 항의 집회와 시위대의 이사장실 난입 등으로 정상 운영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역대 최장기 휴장을 끝낸 1963년 5월 9일, 만신창이가 된 거래소는 공신력 회복을 위해 기존 주식회사에서 공영제로 변신해 다시 문을 열었다. 이때 대증주의 가격은 2전 2리였다. 1년 전 주당 14화 50전(화폐개혁 기준으로는 1월 45전)에 신주를 청약했던 투자자들의 자산 98%가 허공으로 사라졌다.
전개과정을 보더라도 이해 안되는 부분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역사의 미궁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책 57~58쪽).
김재춘 3대 중앙정보부장(재임 기간은 1963년 2~7월로, 당시 김종필 초대 중앙정보부장 세력과 대립 관계였음)이 이끄는 특별조사단은 1963년 3월 증권파동의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특조단에 따르면, 사건은 1962년 1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 휘하의 강성원 조사실 행정관(소령)과 윤응상 일흥증권 사장 간의 만남에서 출발했다. 당시 '투자의귀재'로 불리던 윤 사장은 '농협중앙회 소유 한국전력 주식을 빌려주면 이를 크게 불려주겠다'는 취지의 말로 증시 문외한이었던 중앙정보부를 꼬드겼다. 이후 한국전력 주가를 끌어올린 뒤 내다팔아 폭리를취했고, 이 돈을 다시 대증주 매점에 써 폭리를 취하려다 실패했다는것이 특조단이 파악한 증권파동의 실체였다.
특조단은 윤 사장과 정보부 요원들을 포함해 재무부 장관, 거래소이사장, 농협중앙회장 등 10여 명을 구속했다. 그러나 3개월 뒤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는 피고인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사태를 황급히 매듭지었다. 재판부는 "증권시장의 육성을 위한 충정에서 벌어진일로, 특정인이 불법적으로 이득을 취했다고 볼 수 없다.”라고 판시했다. 두 달 뒤인 1963년 8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공화당을 창설해 총재에 올랐고, 10월 대선에서 46.7%의 득표율로 제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64년 야당이 국정감사를 별여 새로운 의혹들을 제기했습니다만, 결국 제대로 파헤쳐지지 못했죠. 1962년 증권파동은 이후 주식시장의 발달을 가로 막은 결정적 사건이었습니다. 1965년까지 단 하나의 기업도 공개하지 않을 정도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