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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춘욱 Dec 04. 2022

시장의 기억6 - 대우그룹 부도와 투신사 환매중단 사태

고객의 신뢰를 상실한 투신사의 미래는?

오늘은 최근 읽은 책 "시장의 기억"에 대한 여섯 번째 서평입니다. 이번에는 99년 경제를 폭풍 속으로 몰아넣은 대우그룹 사태와 투신사의 부실채권 문제에 대해 다룹니다. 혹시 지난 편 글을 못 본 분들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시장의 기억 - '5.29 강제 상장 조치' 이야기

시장의 기억2 - 1962년 증권 파동 이야기

시장의 기억3 - 80년대의 대세상승 이야기

시장의 기억4 - 주식시장 개방 이야기

시장의 기억5 - 외환위기 주범, 종금사 이야기


***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고금리/재정긴축 정책이 시행되는 가운데 부채가 많은 기업들은 지속적으로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특히 대우그룹이 문제가 되었죠(221쪽).


대우 사태가 일반적인 워크아웃 범주를 완전히 벗어난 것은 (중략) 충격적인 실사 결과가 나오면서였다. 금융감독원은 1999년 11월 4일 워크아웃 대상 계열사 중간 실사 결과를 내놓으면서 대우에 천문학적인 분식회계 의혹을 제기했다. 장부에 92조 원으로 잡혔던 자산이 61조 원으로 급감했기 때문이다. 부채는 87조 원(최종 실사 후 89조 원)으로 9조 원 증가했다. 대우에 얼마 남아 있지 않던 시장 신뢰마저 산산조각 났다. 여론은 경영진 문책론으로 들끓었다.

금융감독원은 1999년 12월 대우 특별감리반을 출범하고 2000년 9월 15일 분식회계 등 혐의로 대우 임직원 52명을 검찰에 고발했다. 2005년 4월 대법원은 대우 관계자들에게 추징금 23조 원을 선고했다. 김 회장의 몫은 사법 사상 최대인 18조 원이었다.


대우그룹의 회계에 대한 의혹은 아주 오래전부터 유명했습니다. 제가 애널리스트 시절 비상장사인 대우자동차의 회계 장부를 열람한 적 있었는데, 90년대 중반 폴란드의 자동차 회사(FSO) 인수 등으로 가파른 현금 유출이 있었음에도 순이이익은 5천만원으로 일정했기 때문입니다. 수 십 만대의 판매고를 올리는 기업의 순이익이 일정한 수준에서 유지된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그 뒤로 대우그룹 계열 주식에 대한 분석을 아예 포기했죠. 왜냐하면 분석한 노력에 비해 대가가 너무 보잘 것 없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당시에는 주식 가격이 액면가 미만일 때에는 증자(=주식 발행)가 불가능한 상황이었기에, 주식시장을 활용한 자본 조달이 불가능했습니다. 반면 '바이코리아' 펀드 열풍을 이용할 수 있었던 다른 그룹들은 증자를 통해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었죠(236쪽). 


펀드 판매를 이끈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은 '2005년 코스피지수6,000 돌파 전망을 제시하며 파격적인 마케팅을 주도했다. 그의 극단적 낙관론은 국내외 금리 하락, 다우지수의 10,000선 돌파, 한국 증시의 저평가 인식과 맞물려 자가발전식 유동성 장세를 일으켰다. 당시 한국의 주식시장 시가총액은 불과 137조 원. 일본전신전화NTT 1종목(157조원)만 팔아도 통째로 살 수 있을 정도였다. 

간접투자시장의 열풍은 그해 7월 투신권 전체 수탁액을 약 250조원대로 부풀렸다. 바이코리아 1호(나폴레옹1-1)의 누적수익률은 설정 5개월 만에 70%에 육박하며 펀드시장의 장밋빛 미래를 밝혔다.1998년 말 출시한 신생 미래에셋자산운용투자자문의 뮤추얼 펀드 '박현주 1호'도 기록적인 수익률을 올리며 기름을 부었다.



***


그런데 대우그룹 사태가 터지면서 투신사가 문제의 핵심으로 부각되었습니다(236~237쪽).


"여기 각서부터 써주시지요."

바이코리아 수탁액이 11조 원을 돌파하고 5일 뒤였던 1999년 8월9일, 김석동 금융감독위원회 금융시장안정대책반장(과장)은 극비리에 투신사 간부들을 서울 마포의 한 호텔로 불러모았다. 그가 건넨 서류 뭉치를 받아든 간부들의 얼굴은 일순간 굳어졌다. 첫 장에 쓰인 제목은 '대우채 환매연기 조치'였다. 

그로부터 3일 뒤 밤 8시, 투신시장에 쓰나미를 몰고 오는 '8·12 환매연기 조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장 환매를 요구하는 가입자에겐 편입 대우채 원금의 50%만 주고, 6개월 이상 기다리면 원금을 거의 전부(95%) 돌려준다는 약속이었다. 부실 채권 처리 시간을 벌면서 개인의 투자손실을 대부분 투신사에 떠넘기는 정부의 극약 처방이었다.


투신사에서 판매한 채권형 상품에 대거 편입된 대우그룹 채권이 문제를 일으킨 것입니다. 투자자들은 자신이 가입한 상품에 대우그룹이 발행한 회사채나 기업어음이 편입된 줄 몰랐고, 또 소식이 빠른 일부는 환매 연기조치 발표 이전에 돈을 다 빼내갔습니다(137쪽). 


투신 수탁액은 시차를 두고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3개월 동안 40조 원의 환매요청이 몰렸고 2000년 말까지 약 100조원이 쓸려나갔다. 투신권에서 불만이 새어나오자 금융감독원은 대대적 검사에 들어가 각종 법규 위반 사실을 들춰냈다. 그동안 펀드를 예금처럼 속여 팔고(불완전판매), 고객 자산을 편법으로 바꿔치기한 사례들이었다. 그러자 "손실을 우리가 다 떠안으라는 얘기냐?" 하며 절규하던 투신권도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쉽게 이야기해, 특정 펀드에 편입된 대우그룹 회사채를 (고객에게 알리지 않고) 다른 펀드로 이전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입니다. 신뢰를 상실한 금융기관들의 미래가 밝을 수는 없는 일이라, 결국 한국 투신업계는 큰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238쪽).


대우채 사태는 12.12 조치 이후 10년을 벼랑 끝에서 버티던 투신의 손을 강제로 떼버리는 사건이었다. 정부는 한국 펀드산업의 '아버지'와 '어머니'였던 공룡 한투와 대투의 파산에 따른 혼란을 막기 위해 1999년 11월부터 각각 5조 원과 2조 9,000억 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했다. 이후 한투는 2004년 동원금융지주(현 한국투자금융지주)에 팔리고, 대투는 2005년 하나금융그룹에 넘어갔다.

바이코리아를 운용한 3투신의 막내 현대그룹의 현대투신운용은 자체 정상화 시도에 나섰다가 실패해 2004년 2조 5,000억 원의 공적자금을 수혈받았다. 이후 푸르덴셜금융그룹에 넘어갔다가 2010년 다시 한화그룹 산하로 들어갔다.


한국 주식시장이 왜 이렇게 변동성이 크고, 또 투자자들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지에 대한 의문은 대우채 사태를 통해 대충 풀린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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