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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춘욱 Dec 04. 2022

시장의 기억7 - 2003년 카드버블 붕괴

4백만 신용불량자 시대, 그리고 내수 장기불황

오늘은 최근 읽은 책 "시장의 기억"에 대한 일곱 번째 서평입니다. 이번에는 2003년 우리 경제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카드버블의 형성과 붕괴 과정을 다룹니다. 혹시 지난 편 글을 못 본 분들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시장의 기억 - '5.29 강제 상장 조치' 이야기

시장의 기억2 - 1962년 증권 파동 이야기

시장의 기억3 - 80년대의 대세상승 이야기

시장의 기억4 - 주식시장 개방 이야기

시장의 기억5 - 외환위기 주범, 종금사 이야기

시장의 기억6 - 대우그룹 부도와 투신사 부실채권 문제


***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회복되던 우리경제가 2000년 정보통신거품 붕괴 이후 다시 침체되고 있었음에도 한국 내수경기는 매우 좋았습니다. 당시 저는 모 증권사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해외에서 방문한 펀드매니저들이 "한국경기가 좋은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274쪽).


“여러분~! 모두 부~자 되세요!"

한국 정부가 IMF 관리 체제를 공식적으로 졸업한 2000년 전후 한국 사회는 '부자 되기 열풍'에 휩싸여 있었다. 경제위기와 중산층 붕괴의 상처는 청빈과 명예를 추구하던 전통적인 관념을 바꿔놓았다. 서점가에선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가 2001년까지 2년 동안 베스트셀러 대열에 올랐다. 배우 김정은 씨가 비씨 BC카드 TV 광고에서 외친 '부자 되세요'란 멘트는 2002년 새해 덕담을 대신할 정도로 유행했다.


수출도 망가지고 주식시장이 붕괴되었음에도 내수 경기가 좋았던 것은 카드 발행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275~276쪽).


"잠깐 오셔서 카드 만들고 가세요.”

한계가구(금융부채가 금융자산보다 많은 가구)에 마법처럼 손쉬운 현금조달 창구가 등장한 것은 1999년 하반기였다. 정부가 그해 연말정산 때부터 급여의 10% 이상 신용카드 결제 시 과세 대상 지표를 줄여주는 소득공제제도를 시행한 결과였다.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새 고객을 경쟁사에 빼앗기지 않으려는 영업사원들이 길거리 가판대로 쏟아져 나왔다. 

LG 카드, 삼성카드 등 카드사들은 별도의 소득이나 신용조사 없이 사은품과 현금을 나눠주며 카드 신청을 받았다. 고수익 부대업무인 현금대출 서비스 덕분에 막대한 영업비용 지출에도 짭짤한 이익을 남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카드사의 영업자금 조달 비용인 카드채 발행금리는 연 10% 안팎인 데 비해 수입원인 현금서비스와 카드론, 할부금리(수수료)는 연 20% 안팎에 달했다. 카드연체율이 기록적으로 낮은 수준을 보인 2001년 7개 카드사는 총 2조 5,000억 원의 순이익을 남겼다. 직원들은 연봉의 50%에 달하는 성과급 파티를 벌였다.

현금대출 서비스 이용자를 더 많이 확보해 '규모의 경제'를 이루려는 경쟁은 갈수록 신용이 나쁜 가입자를 선호하는 '선택'을 자극했다. 이런 사업 전략은 1999년 5월 현금서비스 한도를 자율에 맡긴(월 70만 원 한도 폐지) 규제 완화로 더욱 탄력을 받았다. 탐욕에 눈먼 카드사들은 기존 카드빚에 시달리는 고객에게 대환대출(기존의 빚을 상환하기 위한 새 대출) 서비스를 권장하는 위험천만한 영업을 확대했다.


출처: 한국은행 경제통계정보 시스템.


***


이런 식의 잔치가 끝없이 이어질 수는 없었습니다. 일단 연체율이 폭발적으로 높아지기 시작했죠. 결국 누군가 이 사실을 발견하고 대응하는 순간, 버블이 터질 수 밖에 없습니다(책 276~277쪽).


“양적 팽창을 당장 중단해야 합니다.”

박근희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 경영진단팀장은 2002년 상반기경영진단(감사) 직후 이건희 회장에게 긴급 보고를 올린다. 박 팀장은 삼성카드 감사 과정에서 무서운 변화를 발견했다. '가입자(자산)가 빠르게 늘어나는 시기 낮은 수준을 보이던' 연체율이 뒤늦게 폭증하는기간 경과 효과 seasoning effect였다.

여신금융협회에 따르면 1999년 48조 원이던 카드사들의 현금대출은 2002년 358조 원으로 7배나 늘어나 있었다. 기존 현금 지불을 대체하며 급증한 결제서비스(판매신용) 265조 원보다 90조 원이나 많았다. 같은 기간 경제활동인구 1인당 보유 카드는 1.8장에서 4.6장으로 늘었다. 정부는 2002년부터 부랴부랴 미성년자 발급 제한 강화, 현금대출 취급 비중 제한(50%), 길거리 회원모집 금지 등의 조치를 발표했다. 하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였다.

뒤늦게 연체율 폭증에 놀란 카드사들이 그동안 쉽게 내줬던 현금대출을 거둬들이자 사태는 험악해졌다. 


연체가 대출 회수를 부르고, 대출 회수가 다시 가계와 자영업자의 파산으로 이어지는 연쇄적인 악순환이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2003년 3월 SK글로벌 분식 회계 사건이 방아쇠 역할을 했습니다(277~278쪽). 


투자신탁회사(자산운용사)들이 환매 대금을 마련하려 90조 원에 달하는 카드채 매물을 헐값에 쏟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쏟아지는 매물을 싸게 주워 담으려는 기관투자가도 보이지 않았다. 연체율 폭증으로 언제 쓰러질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카드시는 영업 자금 조달을 전적으로 카드채 발행에 의존한다. 만기 도래 카드채를 상환할 새 카드채의 발행 실패는 모든 카드사의 즉시 부도를 뜻했다. 김 국장은 긴급회의를 요청하고 비상조치를 준비했다.

며칠 뒤인 3월 17일 정부는 신용카드사의 자구 노력을 전제로 자금을 지원하겠다는 '신용카드사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한발 먼저 사태수습에 나섰던 삼성카드는 삼성생명으로부터 5조 원의 금융 지원을약속받아 부도를 피했다. 국민카드는 독자 생존을 포기하고 모기업인국민은행의 사업부로 흡수됐다. 외환카드와 우리카드도 2004년 모은행에 흡수합병됐다.

반면 1,400만 회원을 둔 업계 1위 LG카드는 그룹 지원만으로 회생이 불가능했다. 자금 지원을 둘러싸고 그룹과 채권단이 씨름을 지속하던 2003년 11월 21일에는 예고 없는 현금서비스 중단이라는 초유의'LG카드 사태'로 이어졌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2003년 말 LG카드 및 LG카드의 최대주주인 LG투자증권(현 NH투자증권) 지분을 모두채권단에 담보로 맡기면서 금융업과 결별 수순을 밟았다. LG카드는 나중에 산업은행의 단독 관리를 거쳐 2006년 신한금융그룹으로 넘어간다.


2003년 초 운용사에서 전략팀장으로 일 할 때, LG카드 IR 부서를 방문했던 게 기억 나네요. 연체 상황에 대해 자료를 요구했을 때, IR 업무를 담당하던 실무자가 데이터는 제대로 제공하지 못하면서 "우리는 아무 문제 없다"고 주장하던 일이 기억에 선명합니다. 


물론 그 뒤에 벌어진 일은 다 아는 바와 같습니다. 참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을 겪은 나라라는 생각이 드네요. 즐거운 독서, 행복한 인생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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