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금사의 무분별한 대출과 CP 매매가 외환위기로 이어져
오늘은 최근 읽은 책 "시장의 기억"에 대한 다섯 번째 서평입니다. 이번에는 90년대 말 외환위기의 주범, 종금사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할까 합니다. 혹시 지난 편 글을 못 본 분들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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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외환위기는 환율의 급등과 외환보유고 고갈로 기억되지만, 사실은 연쇄적인 금융위기 끝에 환율이 상승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연쇄적인 금융위기의 주범은 종금사였죠(150쪽).
김영삼 정부는 출범 첫해인 1993년 '지방 단자회사의 종금사 전환 방안'을 발표했다. 지방 중소기업에 종합적인 금융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명분이었다. 나중에 큰 논란을 일으킨 이 방안은 이듬해부터 무려24곳의 영세 단자회사를 종금사로 둔갑시킨다.
종금사는 외화 조달부터 여·수신까지 금융 업무 대부분을 취급할수 있는 '금융백화점'이었다. 1973년 오일쇼크 여파로 외환 부족에시달렸던 박정희 정부는 외자 도입원 확대를 위해 1975년 '종합금융회사에 관한 법률안'을 마련하고 대기업의 참여를 유도했다. 그 결과1976년 '1호' 한국종금(최대주주 대우그룹)을 시작으로 1979년까지 국제(현대그룹), 새한(산업은행), 한불(한진그룹), 아세아(대한방직), 한외종금(외환은행) 등 이른바 '선발 6개사가 탄생했다.
선발 회사들은 영국 등 선진국 금융회사와 자본을 섞어 대외신인도를 개선하고 기업에 신용대출을 제공하며 성장했다. 어음관리계좌(CMA, 종금사가 대출채권 등에 투자한 뒤 수익을 돌려주는 상품) 운용과 발행어음(종금사가 발행한 어음) 판매 방식으로 은행처럼 예금도 받았다. 1993년에는 각각 100명 안팎의 인원으로 6개사 합산 1,128억 원의 순이익을 내며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렸다.
반면 새롭게 종금사로 전환 허가를 얻은 단자회사의 출생 배경은 선발 회사와 사뭇 달랐다. 1972년 '8·3 사채동결조치'로 양성화한 사채업이 뿌리였다. 선발 종금사가 정부의 비호를 받고 화초처럼 성장했다면 단자회사들은 부실채권을 거래하며 잡초처럼 자라났다. 업무 영역도 사실상 '기업어음 할인'이 전부였다. 정부는 자본시장 개방에 발맞춰 금융의 경계를 허문다는 취지로 1994년 9곳, 1996년 15곳의 단자회사에 종금업 '날개'를 달아줬다. 59새내기 종금사들은 앞다퉈 국제금융을 맡을 직원의 채용공고를 냈다. 미래 '외환위기 태풍'을 일으키는 날갯짓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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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구할 때, 종금사와 리스사가 최고의 직장으로 부각되었습니다. 이 업종은 연봉이 가장 높을 뿐만 아니라, 진급도 빠르다는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이었죠. 왜 종금사는 그렇게 돈을 잘 벌었을까요? 그 답은 바로 위험천만한 영업에 올-인했기 때문이었습니다(153쪽).
국내외 저리 자금으로 설비를 구입한 뒤 기업에 빌려주는 리스사업은 쇠퇴하고 국제금융과 고위험 CP 할인 분야는 가파르게 성장했다. 국제금융 업무의 초점도 갈수록 위험한 분야로 이동했다.
새 종금사들은 낮은 이자로 빌려온 달러를 훨씬 높은 이자를 받고 장기로 대출하는 영업을 공격적으로 확대했다. 그 결과 1997년 10월 말까지 종금사의 외화조달 잔액은 약 200억 달러로 불어난다. 이 중 60%는 1년 미만의 단기조달이었다.
일부는 일본 엔화를 단기로 빌려 태국과 러시아, 인도네시아 등 신흥시장 정크본드(투기등급 채권)에 장기로 투자하는 위험천만한 도박도 일삼았다. 종금사 해외 증권투자는 1996년 22억 달러로 전년 대비 8배로 급증했다. 국제금융을 통해 얄팍한 마진만 남기는 데 익숙했던 선발 종금사들은 후발 경쟁사들의 무모한 영업 행태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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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고위험 투자를 했음에도 규제 및 감독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특히 기업어음(CP) 투자도 점점 위험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153쪽).
외화 유동성 관리 등에 대한 감독 기능은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1994년 경제기획원과 재무부의 통합으로 출범한 재정경제원에는 제2금융권을 감시할 전문 조직이 없었다. 외화 단기차입은 사전 보고나 물량 규제 대상도 아니어서 얼마든지 영업을 확대할 수 있었다.
단자회사 시절부터 전문적으로 취급해온 CP 할인 대상도 위험 대기업그룹으로 빠르게 옮겨갔다. 은행과 제2금융권에 대한 비대칭 규제와 1991년 CP 금리의 자유화는 CP의 발행 및 판매를 취급하는 종산업의 폭발적 성장을 가져왔다. 1996년 말 종금사 자산총액은 약 156조 원으로 일반은행(342조 원)의 절반에 가깝게 팽창했다.
새내기 종금사들은 두 가지 위험만 조심하면 종금사업은 '땅 짚고 헤엄치기'라고 느꼈다. 하나는 대출해준 대기업이 한꺼번에 망하는 일, 다른 하나는 사업자금을 단기로 빌려준 쪽에서 만기 연장을 거부하는 일이었다. 전자를 걱정하기엔 '대마불사'의 신화가 건재했다. 후자는 원활한 자금 조달을 위해 채용한 전직 재무부 관료들의 '영업력'에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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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에 이 두가지 모두 무너졌죠(154~155쪽).
종금산업 전체가 처음 공멸의 위협을 느끼게 하는 사건은 1997년 여름에 터져나왔다. 재계 8위 기아그룹의 부도유예 협약 발표였다. 부도유예 협약은 부실 기업이 한동안 빚을 갚지 않고 회생 기회를 모색할 수 있도록 한 제도였다. 정부가 연초 한보그룹으로 시작한 대기업그룹의 부도 도미노를 막아보려 급조한 이 제도는 종금사들을 급작스런 유동성 위기로 내몰았다. 당시 국내 30개 종금사가 기아그룹에 빌려줬던 무려 3조 원대 현금을 묶어버렸기 때문이다.
눈치 빠른 해외 금융회사들은 종금사의 부도 위험을 감지하고 빌려준 달러를 만기 연장 없이 회수하기 시작했다. 종금사들이 1997년 8월까지 연쇄 도산한 7개 대기업그룹에 빌려준 돈은 6조 원을 웃돌았다. 종금산업 전체의 자기자본인 약 4조 원보다 많은 규모였다.
단기로 빌린 돈을 모두 장기대출과 부실 CP에 쏟아부은 종금사는 달러 빚을 갚을 길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혼비백산했다. 이때부터 종금사는 파산을 피하려 각종 범죄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부실 CP를 우량 업체 발행물로 위조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CP를 만들어 판매했다. 이렇게 구한 현금은 황급히 달러로 바꿔 발등의 불을 끄는 데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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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도 뒤늦게 사태 수습에 나섰습니다만, 위기를 피할 길은 없었습니다(155쪽).
종금사들이 서로 달러를 더 비싼 값에 사겠다고 은행에 달려들면서 환율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정부는 8월 25일 '금융시장 안정과 대외 신인도 제고 대책'을 발표한다. 한국은행은 16개 종금사에 1조 원 한도의 특별대출(특별융자)을 공급했다.
하지만 이미 수습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섰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해외 금융회사들은 국내 은행들에도 달러를 빌려주는 대가로 훨씬 높은 보상을 요구하거나 지금 공급을 끊고 있었다. 빌려준 달러 일부가 부실 종금사로 흘러들어 간다는 사실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국가 대외 채무의 10분의 1 수준이었던 종금사 외채의 위기는 어느덧 암세포처럼 번져 한국 금융시스템 전체를 마비시키고 있었다.
1997년 11월 21일 IMF에 구제금융을 공식 신청했고, 종금사들도 살아날 수 없었습니다. 1997년 12월, 14개사의 영업을 정지했다 1998년 1월 예금지급을 재개했으나 급속한 '뱅크런' 탓에 회생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1998년 2월 10곳(신한, 삼삼, 한화, 상용, 경남, 고려종금 등)을 시작으로 그 해에만 16개의 종금사를 폐쇄했습니다.
정부는 2001년 6월까지 종금사에 모두 12조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했습니다만, 대부분은 손실로 처리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참고로 사라진 29개사 중에 28개 사가 상장되어 있었기에, 주주들의 피해도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2010년의 저축은행 사태에 이어, 2022년에는 PF 사태가 금융시장을 엄습하고 있습니다. 어쩜 이렇게 비슷한 일이 끝없이 반복되는지.. 참으로 답답하고 또 속상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