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가 공산주의자에 손에 넘어가는 것을 보느니.. 이승만이 낫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평가가 양극단으로 갈리는 대표적이 인물일 것입니다. 분명 경제적인 성취면에서 볼 때, 그는 큰 일을 해냈습니다. 얼마 전 올렸던 글("R의 공포가 온다3 - 이승만 정부, 막장 정부였나?")에서 살 펴본 것처럼, 이승만 정부는 토지개혁과 강력한 교육 붐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3백 산업(제당, 제분, 면방직)을 육성하여 60년대부터 시작될 제조업 중심의 공업화에 초석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의 높은 성취 뒤에는 깊은 그림자가 존재합니다. 오늘 소개하는 책 "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에서는 이승만 정부에 대한 미국 측의 평가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책은 "좋은 책일수록 빨리 절판된다"는 격언 그대로, 절판된 상태임을 알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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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미군은 한반도의 남부에 진입하면서 한 가지 중요한 의사판단을 내렸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인공(人共)을 한반도의 적법한 정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38쪽)
이 시기에 한국 문제를 담당하던 미국 관료들은'과연 한국인들이 자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했으며, 또한 '인공이 국제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서 조종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미 점령군 사령관 하지 John Hodge 중장은 이 시기의 남한에 대해 "자유세계의 국가라면 당연히 갖추고 있어야 할 최소한의 정치적 감각조차 갖추지 못한 뒤처진 국가"라고 평가했다. 그는 인공에 대해서는 "미군이 도착하기 이전에 설립된 공산주의 정권"이라고선을 그었다.
2차 대전 이후 냉전이 본격화된 시기, 미군정 그리고 미국 국무부 관료들은 인민공화국에 대한 강한 불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대안은 식민지 시기 일본에 협조했던 관료조직이 될 수 밖에 없었죠(38~39쪽).
군정 관료들이 인공을 공산 세력으로 규정하자, 미국 정부도 공산주의 색채가 짙은 인공을 지원하는 것보다는 일본이 만든 식민 관료 조직을 활용하여 남한을 통치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였다. 미 군정은 이후 약 3년 동안 남한을 통치하면서 식민 관료 조직을 재편하고 성장시켰다. 이 시기 미국 정부의 공식 문서도 미 점령군이“식민 통치를 이끌었던 (일본) 총독의 행정 조직" 을 그대로 사용하여 군정을 운영한다고 평가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국(局)’을 ‘부(部)’로 바꾸는 정도의 미미한 조직상의 변화가 있었다. 미 군정은 재편한 식민 관료 조직의 고위직에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 이하 한민당) 인사를 대거 기용했다. 미 군정이 채용한 한민당 인사들은 인공의 주축 세력과 달리 보수 성향을 갖고 있었는데, 이 중에는 순수 민족주의자로서 관료의 자격을 갖춘 사람도 있었지만,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했던 부역자도 많았다.
이런 미 군정의 행동은 좌익 세력의 강한 반발을 부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1946년 10월 1일 대구폭동(혹은 10.1 사건) 등을 거치면서 좌익 세력은 미 군정의 군사력 앞에 무릅을 꿇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남한에 일종의 국가가 형성되었지만, 누가 리더쉽을 장악할 것이냐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39~40쪽).
미국은 인민위원회와 같은 좌익 조직을 와해시키고 일본의 식민 관료조직을 부활시켜 남한에 강력한 정치기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과연 누가 이 정치기구를 통치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미 군정이 통치하는 기간에는 미군 지휘관이 이 기구를 지휘했으며, 한민당 소속의 보수적 성향의 참모들이 보좌했다. 그러나 미 군정은 미군의 남한 점령이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관료 조직과 남한을 통치할 수 있는 적절한 지도자를 찾아내야 했다.
그런데 미국 정부는 한민당에 남한을 맡기는 것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미군정 관료들은 한민당 소속의 인사들이 대부분 일본에 협조했던 부역자라는 점을 우려했다. 미국은 우익이 남한의 정치체제를 주도하더라도,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에 따라서 '다양한 정치 세력이 경쟁하는 체제가 바람직하지 않겠는가?"라는 이상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1946년과 1947년에 장차 남한에서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후보로 보수와 온건의 연합 세력을 만들려고 했으며, 특히 자유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지도자를 물색했다. 그러나 당시 남한에서는 온건 민주주의 세력을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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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당은 '친일'의 과거에서 자유롭지 않았고, 인공은 '10.1 사건'으로 완전히 적대적 세력으로 돌아섰죠. 결국 이 과정에서 이승만이 대두됩니다(40~41쪽).
당시 70세였던 이승만은 20여 년동안 미국에서 활동했다. 그는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수학했고,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 정부를 상대로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했으나, 그의 노력은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이과정에서 그는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었고, 이에 따라 일본 패망 이후 남한에 진주한 미 점령군은 이승만에게 귀국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그는 1945년 10월 미 군정의 환영을 받으며 귀국했다. 미 군정이 이승만에게 기대했던 것은 그가 민족주의자라는 자신의 위상을 이용하여 한국인들에게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며 공산주의에 대항하여 싸우도록 독려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지난 20여 년 동안 (자신의 독립운동 노력을 외면했던) 미국 정부에 대한 좋지 못한 기억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단순히 미 군정의 요구에 협력하기보다는 자신이 오랫동안 꿈꿔왔던 것을 추구하려 했다. 그는 먼저 좌익 세력이 한반도를 장악하는 것을 묵인하지 않겠다는 미 군정의 정책에는 동의했지만, 미군정이 추구하는 중도 세력 연합에 가담할 생각은 없었다. 대신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한국사회가 정치적으로 양분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이승만은 귀국 즉시 인공을 주도했던 좌익 세력을 격렬하게 비난하면서, 한민당의 보수 세력과 연합했다.
정치9단의 등장이네요. 그리고 그는 사사건건 미군정과 대립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향상시켰습니다(41쪽).
귀국 후 남한에서 정권을 장악하려 했던 이승만의 노력은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협상을 실시하는 시점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남한의 정치 세력을 결집하여 격렬한 반대를 선도했고, 이를 계기로 남한의 정치 세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승만은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주관한 한반도 문제에 대한 소련과 미국의 협상을 공개적으로 반대했고, 남한 사회의 보수 세력에게 자신을 지지하도록 압박했다.
그가 이처럼 행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만약 미국이 소련과의 협상을 포기하거나, 좌익이 주도하는 정부를 수립하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미국은 소련과의 협상을 포기하는 쪽을 선택할 것이라고 판단했기때문이다. 이승만을 포함한 남한의 반대에 부딪힌 미국은 한반도에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소련과의 협상을 포기하고, 1947년 9월에 한반도문제를 유엔 총회에 상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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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젊었을 때에는 이승만 참 싫어했는데.. 북한의 남침이 '기밀 문서 해제'로 드러난 다음부터는 그가 상황 판단이 뛰어난 냉철한 정치인 이였음을 인정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https://www.korea.kr/news/policyNewsView.do?newsId=148746351
다음 시간에는 이승만이 대통령의 지위에 오른 이후에 벌어진 일들을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