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정부는 지지세력을 확보하고, 대한민국은 재산권을 가진 국민을 가져
최근 흥미롭게 읽은 책, "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에 대한 2번째 서평입니다. 혹시 지난 번 서평을 못 본분들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이승만 외의 대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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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대한민국의 첫 번째 대통령은 이승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은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에 대해 많은 우려를 표명했죠(42쪽).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은 한반도가 남한과 북한으로 분단되고 남한에 독자적인 정부가 수립된다면, 그것은 이승만이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이러한 예상이 적중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은 환호하기보다는 근심에 빠졌다.
1948년경에 이미 일부 미국 관료들은 이승만의 독재적 성향과 다루기 힘든 성격에 혀를 내둘렀기 때문이다. 미 국무부에서 작성한 <이승만에 대한 비밀 보고>는 “이승만이 현실 정치가로서 갖춰야 할 역량과 자질이 턱없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국민으로부터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것은 믿기 어렵다"라고 평가했다.
미국 정부는 이러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이 지도자로서 갖춰야 할 객관적인 조건들, 즉 연륜과 경험, 교육 수준, 민족주의적 성향을 높이 샀다. 또한 그가 한국의 다른 정치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자질을 갖췄다고 분석했다. 특히 그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싸운 민족주의자로 국제적 명성을 갖춘 인물이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공산주의의 위협에 맞서 싸울 반공주의자라고 판단했다. 이러한 성향은 미국 정부가 이승만을 대한민국의 정치 지도자로 받아들이기에 충분한 자격이었다.
그리고 이 우려는 그대로 현실이 되었습니다(42~43쪽).
정권을 장악한 이승만은 정치권력 강화에 나섰다. 우선 그동안 협력 관계를 취해왔던 한민당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 강화를 시도했다. 그는 1948년 8월 정부 수립 이후에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 한민당의 보수 세력과 격렬한 힘겨루기에 나섰다. (중략) 특히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에게 요직을 제공하고, 경쟁자는제거했다. 대통령 취임 직후 그는 미 군정에서 활약했던 한민당 인사를모두 핵심 관직에서 몰아냈고, 대신 자신에게 충성하며 신뢰할 만한 인사를 대거 채용했다.
1949년 3월에 주한 미국 대사관이 작성한 보고서에따르면 미 군정에서 주요 보직을 지냈던 사람들 중에서 대한민국 정부가출범한 이후에 장관이나 차관으로 채용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 보고서는 "내각에 등용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이승만과의 개인적 친분이나그에 대한 충성심이다"라고 평가하며, “(이승만은 조금이라도 자신에게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은 아예 배제했다"라고 덧붙였다. 이처럼 지지자를 관료로 채용하고, 반대파를 배제하는 경향은 이승만이 집권하는 동안 한국 정치문화의 뚜렷한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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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19 혁명으로 권좌에서 쫓겨날 단초가 이미 1948년 대통령 선거 직후에 나타났던 셈입니다. 이제 이승만 대통령의 사실상 유일한 위업, 농지개혁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46쪽).
미 군정은 일본인 지주들이 보유하던 약 2,780제곱 킬로미터의 토지를 인수했는데, 1948년 초에 이 토지를 농민에게 매각함으로써 58만7974가구(家口), 즉 남한 농업 인구의 24.1퍼센트에 해당하는 농민이 새롭게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 조치 이후 일부 농민의 상황은 호전되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남한의 토지 문제는 아직도 갈 길이 먼상황이었다.
한마디로 평가하자면 미 군정은 농지 개혁의 핵심적인 사안, 즉 '어떻게 지주의 토지를 재분배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미군정도 포괄적인 농지 개혁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으나, 한국인 지주의 토지를 재분배하는 문제는 일본인 지주가 소유했던 토지를 분배하는 것보다 훨씬 민감한 사안이었다. (중략) 논란 끝에 1946년 12월에 소집된 남조선과도입법의원(南朝鮮過渡立法議院)은 지주와 보수 세력이 주도했는데, 이들은 자신의 정치권력의 기반인 토지를 포기하려고하지 않았다. 미 군정은 입법의원에게 토지개혁위원회를 결성하라고 압력을 가했지만, 입법의원은 이를 끝까지 거부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위업은 사실상 농지개혁 하나 뿐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분들이 계시겠지만, 남한 만의 단독 정부 수립은 대통령 이전에 이뤄진 일이니 빼는 게 맞지 않나 생각합니다. 조금 더 인용해보겠습니다(47쪽).
결국 농지 개혁 문제는 1948년 8월에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에게 맡겨졌다. 이후 약 1년간 지속된 농림부와 국회의 논쟁 끝에 정부는 1949년 6월에 농지 개혁에 대한 새로운 법안을 마련했다. 이 법안은 소유주가 직접 경작하지 않는 모든 토지와 3만 제곱미터(약 9,180평)가 넘는 모든 토지를 재분배 대상으로 규정했다.
이 법안에 따르면 이와 같은 토지를 재분배하기 위해서 정부는 해당 토지의 평균 연간 생산량을 조사한 후, 이 금액의 150퍼센트를 지주에게 지불하고 구매할 예정이었다. 한편 정부로부터 땅을 분배받은 농민은 향후 10년에 걸쳐 토지의 연간 생산량의 125퍼센트를 정부에게 납부해야 했다. 하지만 이 법안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재정 위기에 처한 정부는 1950년 3월에 법안을 일부 수정하여 정부로부터 토지를 구입한 농민이 지불해야 할 금액을 해당 토지에서 산출된 연간 생산량의 150퍼센트로 상향 조정했다. 그러자 한민당 소속의 지주들이 주축을 이루던 국회는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와 정치권력의 근간을 무너뜨릴 수 있는 이 법안을 반대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법안을 찬성하는 농민 단체를 동원하여 여론을 형성하는 등 국회가 이 법안을 통과시키도록 압력을 가했고, 이를 통해서 지주 계층을 정치적으로 소외시키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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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당 계열과 정권 잡기 전에는 협력했지만, 정권을 잡은 이후 결별했던 효과가 농지개혁에서 확연하게 드러난 셈입니다(48~49쪽).
분명한 사실은 정부 수립 이후에 포괄적인 농지 개혁이 진행되었으며, 이승만 정권과 미국 관료들이 이를 지지했다는 것이다. 1944년에는 상위 3퍼센트의 지주층이 약 64퍼센트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1955년에는 상위 6퍼센트의 지주층이 소유한 토지가 18퍼센트로 줄어들었다. 반대로 이 기간에 소작농의 비율은 49퍼센트에서 7퍼센트로 감소했다. (중략)
이승만이 적극적으로 농지 개혁을 추진한 이유는 그 과정에서 국가가 사회 변화를 통제할 수 있었고, 또한 국가의 권위를 더욱 강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대대적인 농지 개혁은 이승만의 라이벌인 지주층을 약화시켰으나, 결코 이들을 제거할 수는 없었다. 농지 개혁 이전에는 지주의 사회적 지위와 권력이 토지에 근간을 둔 소작제에 의해 유지되었으데, 1950년 4월에 주한 미국대사 존 무초 John Muccio는 농민은 더 이상사회적 불만 계층이 아니라 "가장 사회 안정을 바라는 계층"이라고 분석했다.
무초 대사의 발언이 오늘 서평의 '핵심'인 것 같습니다. 농민들은 자신의 토지를 가지는 순간 '기득권 세력'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 결과 북한의 침략에 맞서 대만민국 국민들이 떨쳐 일어섰죠(50쪽).
한국 정부가 순조롭게 농지 개혁을 이행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자산. 즉 예산의 출처는 미국의 경제 원조였다. 지주에게 아무런 보상 없이 토지를 몰수하여 일괄적으로 분배한 북한의 농지 개혁과 달리 한국 정부는지주에게 적절한 대가를 지급하고 토지를 매입했다. 따라서 한국의 농지 개혁은 북한의 농지 개혁과 달리 국가가 큰 재정 부담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다. (중략)
한국의 농지 개혁은 북한이나 중국의 농지 개혁보다 완만하게 진행되었지만, 그 결과는 매우 중요했고 효과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볼 때, 농지 개혁은 향후 몇 년간 이승만 정권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새로운 사회구조를 형성했다.
한국전쟁 기간 중에 북한이 한국사회를 구조적으로 전복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대부분의 농민은 끝까지정부에 대한 지지를 저버리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농촌과 농민은 이승만에 대한 열렬한 지지층으로 남아 있었다.
농지개혁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일전에 올린 서평("아시아의 힘3 - 감사합니다! 라데진스키 박사님!")을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한국 전쟁 이후의 이승만 정부가 저질렀던 각종 실책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