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의 기독교 지배자와 다수의 이슬람 피지배자가 만든 불안한 균형
남종국 교수의 책 "천년의 바다"에 대한 두 번째 서평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와 터키의 오스만 투르크가 노예군단에 의지하며 극단적인 세력을 키웠다는 이야기를 한 바 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이탈리아 최남단 시실리 섬을 지배하던 노르만 왕가의 실험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번 서평을 못 본 분들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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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무위키.
중세의 역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세력 중에 하나가 노르만 세력입니다. 노르만 세력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덴마크 지역을 지배하던 해상세력으로, 7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유럽은 물론 러시아로 진출하기 시작합니다. 노르만 족은 좁고 넓은 바이킹 배를 이용해 제일 먼저 영국과 프랑스를 노략질하기 시작했으며, 러시아를 남북으로 종단해 현재 우크라이나의 키이우를 건설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노르만 족의 일파는 지중해로 진출해, 시실리 섬을 중심으로 이탈리아 남부를 지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오늘은 시실리를 지배했던 노르만 세력 이야기입니다(책 156쪽).
중세 전반까지 시실리 섬은 오랫동안 동로마 제국의 땅이었다. (중략) 9세기에 시작된 이슬람의 지배는 11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다.이슬람으로부터 시실리 섬을 뺏은 세력은 11세기에 유럽 북쪽에서 내려온 노르만족이었다. 그 후 12세기 말 시칠리아 노르만 왕가가 독일의 호엔슈타우펜 가문과 혼인하게 되면서 이 지중해 섬은 독일인이 지배하게 되었다. 노르만과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지배가 끝나고 시칠리아를 차지한 세력은 프랑스의 앙주 가문이었다. 앙주 가문의 지배는 매우 짧았고, 13세기 말부터 시칠리아는 이베리아반도의 아라곤 왕국의 영토가 된다.
중세 시실리 섬은 특히 노르만 지배 시기에 전성기를 누렸다. 노르만 세력이 이곳을 점령할 당시 시실리 섬은 고대 지중해 문명의 유사 그리고 정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유산을 간직하고 있었다. 노르만족이 시실리 섬을 장악했을 때 이러한 역사와 혼합 문명의 요소는 인구 구성에도 드러나 있었다. 대략 25만 명 정도의 무슬림 주민이 인구의 다수를 구성했고, 소수의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함께 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정복자인 노르만족이 할 수 있는 것은 이슬람을 포용하는 것이었다.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무슬림을쫓아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고, 여러 면에서 실익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재정복 초기의 이베리아반도 상황과 유사했다. 당연히 서로 다른 문화가 섞이게 마련이었고, 그 결과 비잔티움 양식, 이슬람 양식, 노르만 양식, 고딕 양식 등 다양한 양식의 건축물과 아랍어와 유럽언어 등 다양한 언어가 혼합된 어휘들이 만들어졌다. 중세 시칠리아에서 작성된 라틴어 문서에는 아랍어에서 들어온 어휘들이 곳곳에 있어 해독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노르만 왕국의 국왕 루제루 2세 때에는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독교와 이슬람세력이 화합하는 듯 했습니다(157쪽).
다수의 무슬림인과 소수의 정복자라는 인구 구성 하에서 노르만 왕들은 무슬림에 대해 우호적인 정책을 펼쳤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능력과 재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무슬림에 대한 노르만 왕들의 태도는 당시 일반 기독교인들의 원성을 살 정도로 매우 우호적이었다. “루제루 2세(Ruggeru II, 재위 1130-1154) 시기의 시실리 섬에서는 무슬림들이 진심으로 대우받고 보호받았다. 심지어 프랑크족에 대항하면서까지 루제루 2세는 무슬림을 보호했다. 그래서 무슬림들이 루제루 2세를 매우 사랑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루제루 2세는 북아프리카 출신의무슬림 학자였던 알 이드리시al-Hdrisi를 등용해 세계 지도 제작을 맡겼다. 이에 이드리시는 지리학 보고서를 발간했는데 이 책은 알 이드리시의 세계 지도 혹은 루제루의 지도Tabula Rogeriana로 불린다. 이 책은 여러 나라의 지역, 해안, 육지, 만, 바다, 수로 그리고 강을 표시하고, 이를 다시 기후와 풍토에 따라 일곱 개의 권역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책에는이후 널리 알려지게 될 세계 지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이슬람의 지리 정보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지도의 아래쪽이 북쪽으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북유럽에서 내려온 노르만족 출신의 기독교 가문이 북서 아프리카 출신의 무슬림 지리학자에게 세계를 이해하는 지리서 제작을 의뢰했다는 것 자체가 민족과 종교를 넘어선교류의 증거이기도 하다.
이드리시의 지도는 이후 이슬람 지도 그리고몽골 시대에 제작된 세계 지도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루제루 2세 당시건축된 성당과 건물들도 여러 문화가 혼합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대표적인 사례가 체팔루Cefalu 대성당이다. 이 성당은 비잔티움 양식의 특징인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으며, 고딕 양식의 흔적도 보인다. 팔레르모의 은수자 요한 성당도 루제루 2세 시절 건축된 성당으로, 이슬람 양식과 고딕 양식으로 되어 있다.
https://madainproject.com/al_idrisi_maps#gallery-2
https://en.wikipedia.org/wiki/Cefal%C3%B9_Cathed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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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까지 읽으니 시실리 섬에 가보고 싶네요. 그러나 화합의 세상은 오래가지 못했다고 합니다(160쪽).
무슬림에 대한 노르만 왕조의 우호적인 정책과 여러 종교권의 예술양식이 혼합된 건축물들은 중세 시실리 섬을 종교 간의 공존과 문명 응합의 용광로로 보게 만든다.
하지만 조금 더 긴 시간과 관점에서 바라보면 다른 모습이 보인다. 노르만 왕조가 시칠리아를 지배하는 동안 섬의 무슬림 인구가 크게 감소했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것이다. 역사가들의 추정에 따르면 한 세기 동안 시실시 섬에서 무슬림 인구의 80%가 줄어 들었다. 노르만족이 섬을 정복하자 부유한 무슬림들은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로 망명했고, 여력이 되지 않았던 하층 무슬림들이 주로 시실리 섬에 잔류하게 되었다. 그들은 소수 기독교인의 지배를 감내하고 살았지만, 때론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150년대부터는 노르만인들은 실용적인 노선을 버리고 무슬림들에게 기독교로의 개종을 강요했고, 때론 무슬림에 대한 조직적인 학살을 자행하기도 했다. 무슬림에게 우호적이었던 루제루 2세도 말년에는 기독교화 정책을 시행했다.
십자군 전쟁 속에서 상대에 대한 원한이 쌓이는 중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161~162쪽).
무슬림과 기독교인 노르만 지배자들 사이의 갈등과 무슬림의 반란을 해결하기 위해 결국 프리드리히 2세는 약 2만 명 정도의 무슬림을 강제로 본토의 이탈리아 도시 루체라로 이주시켰다. 현재 기준으로 보면 많지 않은 규모이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엄청난 규모의 이동이었다. 물론 강제 이주였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기독교 영토 한가운데 내쳐진 무슬림을 적극적으로 보호했고 상당한 수준의 자치도 허용했다. 그 덕분에 무슬림 병사들은 프리드리히 2세의 정예부대가 되었고, 주군이 이탈리아반도에서 다른 기독교 군대와 싸울 때 충성스러운 군대로 활약했다. 13세기 중엽에 이곳을 방문한 이집트 대사는 기독교 영토 한가운데 있는 무슬림 공동체가 평화롭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놀라워하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무슬림들이 공개적으로 이슬람 예배를 드리고, 왕국 내 높은 지위에 오른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프리드리히 2세가 만들어낸 공존의 공간은 분명 중세 지중해 역사에서 매우 예외적인 모습이다. 이슬람과의 활발한 교류와 접촉, 이슬람 문화에 대한 이해, 무슬림에 대한 우호적인 정책 등은 종교 간의 화합과 공존을 증명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공존은 다른 종교와 문화에 대한 관용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다수의 무슬림과 소수의 정복자라는 인구 구성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한 세기 동안 시칠리아섬에서 무슬림 인구가 격감했다는 사실 또한 평화로운 공존이 오래가지 않았거나, 겉으로 보이는 공존 이면에 뿌리 깊은 갈등이 도사리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나마 기독교 세계 한가운데 고립된 프리드리히 2세 치하의 무슬림 도시는 프랑스 출신의 앙주 가문의 수중에 들어가면서 점진적으로 기독교 도시로 바뀌었다. 초기 정복 과정에서 무슬림들의 저항과 반란이 있었지만 앙주 가문은 무슬림 공동체를 완전히 파괴하지 않았다. 그러나 13세기 말에 이르면 상황은 더 나빠졌다. 기독교 영토 한가운데 있는 무슬림들을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시키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수천 명의 유대인에게 개종을 강요하기도 했다. 결국 1300년 앙주 가문의 샤를 2세(Charles II, 재위 1285-1309)는 기독교 신앙심을 고취하고자 이 무슬림 도시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지역 관리 조반니 피피노Giovanni Pipino에게 8주 내로 개종하지 않은 무슬림을 모두 제거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조반니는 병사를 이끌고 무슬림을 집단적으로 학살했고, 이슬람 사원과 학교도 파괴했다.
유럽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스페인과 프랑스가 양대 혐성국인데.. 오늘 그 본색이 나오는군요. ㅠ.ㅠ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