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춘욱 Jan 08. 2023

한국의 유가증권 100년사2 - 건국국채 이야기

연 5% 이자에 만족 못하는 투자자들이 할인판매하면서 '고수익' 가능해져

아주 오래 전 읽었던 책, "한국의 유가증권 100년사"의 내용을 소개하는 중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1949년 대한증권의 설립부터 1956년 증권거래소까지의 사건을 정리했는데, 이번 시간에는 건국국채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혹시 지난 번 글을 못 본 분들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세요.


한국의 유가증권 100년사 - 증권시장의 출현


***


건국국채가 무엇인지부터 알아보겠습니다(240쪽).


국채발행문제는 정부수립 직후부터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처음의 쟁점은 재정적자를 경제협조처(ECA) 원조물자 판매대금으로 보전할 것이냐, 아니면 국채발행으로 해결할 것이냐 하는 문제였다. 결국 이 문제는 원조물자 판매대금으로 재정적자를 해결할 경우 산업부흥자금의 부족을 초래하여 자립경제의 확립에 어려움이 생길 수 있다고 평가되어, 원조물자를 이용한 산업부흥과 국채발행을 통한 재정적자의 해소가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결론지어져 해결되었다. 따라서 재정적자 해결을 위한 국채발행 여건은 1949년 초부터 이미 성숙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표 4-10>을 보면, 국채의 발행량이 미미했음을 발견할 수 있죠. 그러나 한국 전쟁 이후에는 건국국채의 발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1959년 말이 되면, 아주 중요한 자산가들의 투자 수단으로 부각됩니다(245쪽). 


1959년 말 국채 총잔액은 483억 4,800만 환이었는데, 한국은행 보유액은 600만 환으로 무시할 정도였다. 산업은행을 포함한 일반은행의 보유액은 42억 9,700만 환이었으며, 보험회사의 보유액은 7억 500만 환이었다. 그 나머지 433억 4,000만 환은 무역업자, 각종 기업체 종사자, 개인에 의해 보유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긍정적으로 본다면, 막대한 전쟁 비용을 조달하는 데 국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산가들이 건국국채를 집중적으로 사들인 이유는 투자 수익이 아주 짭짤했기 때문이었습니다(246쪽).


건국국채의 유통량이 급격히 증가한 데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우선 지적할 수 있는요인은 1950년대 전반기를 주도했던 지가증권을 대체할 만한 다른 적합한 주식이 아직 상장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증권의 공급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1950년대의 증권시장에서 원리금의 상환과 위험도가 낮은 국채는 매력적인 증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국채의 투자수익률이 매우 높았다는 점이다.한국증권거래소(한국증권거래소10년사, p.67) 에서의 계산에 따르면, 국채의투자수익률은 1956년에 110%, 1958년에 51%, 1960년에 47%로서 당시의물가상승률을 고려하더라도 국채의 실질수익률은 私債市場에서 형성된 금리수준을 능가하거나 비슷하였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면 국채의 투자수익률이 높게 형성된 배경은 무엇인지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지적할 수 있는 사실은 이 시기의 국채가 행정기구를 통한 강제할당방식과 첨가소화방식에 의해 소화되었기 때문에 일반국민에게 널리 보급되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광범위한 국채의 공급자가 되었는데, 소액권 인수가 대부분이었던 이들의 입장에서 이율 5%의 국채는 투자가치가 매우 적었다. 따라서 이들은 국채인수 직후에 대부분 처분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국채가격은 발행 초기일수록 헐값에 거래되었다. 한편, 정부는 국채발행 초기부터 그 소화를 원활히 하기 위해 국채의 활용도를 제고하기 위한 다양한 조치를 강구하였다. 1950년 2월에 발표한 정부담화에 의하면, 국채는 귀속재산 불하대금, 주세, 담보보증금, 은행융자에 사용할 수 있었다. 다만 이 때에는 특정인에게 부가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개인할당액 이상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은 제약이 있었다. 1952년 4월에는 국채를 입찰 또는 정부 납품물품의 보증금으로 사용할 수 있게 확대함과 동시에 초기에 설정된 제약을 완화하였다. 따라서 국채에 대한 수요는 계속 증가하고 있었다.


차 살 때 채권을 매입한 후, 그걸 바로 창구에서 팔아버리듯... 건국국채도 소액으로 발행되었기에, 발행되자 마자 마로 헐값에 처분되었던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1958년 발생한 1.16 국채 파동에 대해 말씀드릴 것을 약속하며 이만 마무리 하겠습니다. 즐거운 독서, 행복한 인생되세요~

작가의 이전글 한국의 유가증권 100년사 - 증권시장의 출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