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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춘욱 Jan 08. 2023

한국의 유가증권 100년사 - 증권시장의 출현

지가증권과 건국국채가 주된 거래대상이었고, 점두 거래 위주!

얼마전에 소개했 책 "R의 공포가 온다"에 잠깐 등장했던 한국 증시의 태동기를 다룬 책 "한국의 유가증권 100년사"의 일부를 소개할까 합니다. 책 이름에서 보듯, 식민지기부터 한국의 유가증권(주식과 채권) 시장이 어떤 식으로 발전하고 또 고난을 겪었는지 풀어주는 책입니다. 지금은 절판 상태이니, 도서관에서 대출해 볼 것을 권합니다. 


***


이야기는 1949년 한국 최초의 증권사, 대한증권 설립에서 시작됩니다(210쪽). 참고로 저의 두 번째 직장(1996~1998년)이 교보증권인데, 이 회사가 바로 대한증권을 인수해 이름을 바꾼 것입니다. ^^


1949년에 대한증권주식회사가 설립되었지만 주식거래의 규모는 매우 빈약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한증권 설립과 거의 때를 같이 하여「농지개혁법」 및 동 시행령과「국채법」및 동 시행령이 제정되면서 증권시장의 발전에 있어 중요한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중략) 「농지개혁법」에 의해 농지를 매수당한 지주에게 농지에 대한 대가로 교부된 지가증권이 증권시장에 출회하기 시작한 것은 1951년경부터라고할 수 있다. (중략)

여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하나는 삶의 터전으로부터 쫓겨나온 지주들의 궁핍한 생활이 생계수단으로서 지가증권의 판매를 강요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전비조달과 유엔군 대여금 지출에 기인하여 발생한 인플레이션이 지가증권의 가치를 빠르게 하락시키고 있었다는 점이다. 지가증권은 5년 만기 연부상환의 발행조건에다가 매 年賦額을 현금으로 보상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인플레이션 상황하에서 그 가치가 크게 하락하였다.이러한 배경하에서 지가증권은 염가로 증권시장에 공급되었던 것이다.


지가증권 뿐만 아니라 건국국채도 유가증권시장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책 201~211쪽).


1949년 12월부터 발행되기 시작한 건국국채는 (중략) 1950년대 전반기에는 지가증권보다 거래에 사용된 물량이 훨씬 적었다. (중략) 제1회 건국국체가 발행된 직후인 1950년 2월에 송인상 이재국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국체로서 주세를 납부할 수 있고 담보보증금으로도 활용할 수 있으며 은행융자를 받는 데도 사용할 수 있다”는 발표를 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조치로 지가증권과 건국국체에 대한 수요가 창출되어 거래를 촉진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1951년경부터 지가증권과 건국국채는 본격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하였다. 이 때 증권공급자는 액면가보다 훨씬 싼 값으로 지가증권과 건국국채를 공급하였기 때문에 증권업자의 입장에서 증권을 수집하여 판매하는 것은 막대한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따라서 이들은 증권회사에 찾아오는 고객만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인근의 농촌지역은 물론 전국 방방곡곡에 분산되어 있는 증권을 수집하기 위해 증권외무원을 고용하여 지가증권과 건국국채를 수집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증권시장이 개설되지 않은 상황에서 증권거래는 증권회사를 통해 매개될 수밖에 없었는데, 1949년에 면허를 받은 대한증권주식회사를 제외하고는 아직 정부로부터 면허를 받은 증권회사는 없었다. 당시의 자료에 따르면 임시수도 부산에는 증권매매를 위해 수많은 무면허(사설) 증권업자들이 간판만 내걸고 활동하였다고 한다. 원래 서울에 사무실을 둔 대한증권주식회사의 활동은 이 때 매우 부진했는데, 정부는 무면허 증권업자들의 활동으로 초래될 증권거래질서의 문란을 방지하기 위해 1952년 3월 8일에 행정명령을 공포하였다. 그 중요한 내용은 “한국전쟁으로 일시영업을 중단하고 있던 대한증권주식회사로 하여금 업무를 재개하여 위법사설 유가증권업의 횡포를 막으라는 것”이었다. 대한증권은 같은 해 3월 17일에 업무재개에 관한 보고서를 재무부 장관 앞으로 발송하고 곧이어 업무를 재개하였다. 대한증권이 업무를 재개함에 따라 정부는「조선유가증권취체령」(1943. 9. 10)에 근거하여 무면허 증권업자들의 업무중지 처분을 명하였다.


대한증권만 큰 이익을 누릴 환경이 되었군요. 정부도 단 하나의 증권사가 건국국채 및 지가증권 매매를 담당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보고 새로운 증권사의 설립을 촉진하게 됩니다(212~213쪽).


이와 아울러 정부는 무면허 증권업자들을 면허업자로 전환시키기 위한 노력도 병행하였다. 그 최초의 성과는 1952년 8월 10일에 경남 출신의 지주를 중심으로 설립된 고려증권주식회사(대표 김상봉)였는데, 이 회사는 우리 나라 제2호 면허 증권회사가 되었다. 이어서 1953년 5월에 영남증권주식회사(면허 제3호)와 국제증권주식회사(면허 제4호)가 설립되었고, 같은 해 9월에 동양증권주식회사가 면허 제5호의 증권회사로서 설립되었다.

다수의 증권회사가 설립된 것은 증권시장의 발달에 중요한 전기였다. 처음에 이들 증권회사는 각 회사에서 증권거래를 독립적으로 운영하였으나 증권거래의 조직화, 즉 공동시장(증권거래소)의 확립 필요성을 점차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제반 여건이 성숙되지 않은 상황에서 직접 증권거래소를 개설하는 것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하여 이들 증권회사는 우선 증권거래소의 설립과 그 근거법인 증권(거래)법의 조속한 제정을 위해 증권업자들의 단결과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에 의견이 일치하였다. 이러한 합의에 따라 증권회사 대표들이 처음으로 모인 것은 1953년 10월 16일이었다. 이 날 이들은 대한증권업협회 발기인회를 개최하여 정관을 작성하고, 이어서 10월 19일에 대한증권업협회 창립인가신청서를 정부에 제출하였다. 정부로부터 설립인가가 나온 것은 그로부터 한 달 후인 11월 18일이었다. 이에 창립발기인회는 11월 25일에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정관을 의결하고 대한증권주식회사 사장인 송대순을 초대 회장에 임명함으로써 대한증권업협회(이하 협회)가 탄생하였다.


1997년 외환위기 때 사라졌던 고려증권의 이름이 새롭네요. 1953년 증권업협회가 창립되었지만, 거래소가 설립된 것은 이로부터 한참 뒤인 1956년이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거래소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살펴보죠(책 213~214쪽).


이전에 증권거래는 증권회사를 매개로 한 개인거래형식, 즉 점두거래(OTC)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이 거래방식은 협회가 설립된 이후에도 한참 동안 그대로 유지되었다. 점두거래의 문제점은 분명하였다.

첫째, 동일한 증권의 가격이 증권회사마다 다르다는 점이다.
둘째, 물물교환경제에서와 마찬가지로 원하는 가격으로 원하는 수량만큼 거래가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점이다. 

거래규모가 작을 때는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으나 거래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점두거래방식의 문제는 크게 부각되었다. 더욱이 협회설립 초기에는 회원 상호간의 의사소통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아 증권거래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와 같은 점두 거래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 거래소입니다. 1물 1가, 즉 동일한 주식이나 채권의 가격은 통일되며 또 부족한 거래를 보완하는 다양한 제도(동시호가 등)를 통해 유동성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래의 청산에 벌어지는 문제도 상대적으로 대응이 쉽습니다. 그러나 얼마전 다룬 글("시장의 기억2 - 1962년 증권 파동 이야기")에서 보듯, 증권거래소 설립 이후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무튼.. 한국 증권시장은 시작부터 험난했고 이후에도 더 큰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정도로 첫 번째 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즐거운 독서 행복한 인생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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