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완벽한 순간이 찾아온다면

by 인기
완벽한 순간은 결코 두 번 오지 않지만, 우리에겐 그 순간이 너무 빨리 와버렸잖아요


레이먼드 챈들러의 마지막 장편소설 <원점회귀>에 나오는 문구다. 분명 소설 자체는 대단하지 않다.

<기나긴 이별>이나 <빅슬립> 같은 전작들에 비하면 구성도 치밀하지 못하고, 뿌려 놓은 떡밥 회수도 신통치 않다. 하지만 나는 <원점회귀>를 좋아한다. 작품 전반에 깔려있는 태도랄까,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


존경하는 레이먼드 챈들러

전작들에서 주인공 필립 말로는 한마디로 멋졌다. 쿨하고 냉소적이며 그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는 LA의 사립 탐정. 취향도, 기호도 세련됐다.





진부한 표현으로 그는 진정한 남자다.
그것은 몸에 배어 자연스럽고, 본능적이고, 필연적이지만 남들 앞에서 스스로 떠벌리지 않는다.
자신이 사는 세계에서는 최고의 남자여야 하며
다른 세상에서도 잘 통하는 남자다







레이먼드 챈들러가 묘사한 필립 말로인데, 이런 ‘최고의 남자’가 <원점회귀>에선 달라진다. 세상 풍파를 겪을 대로 겪은 40대 중반의 탐정은 어딘가 기운이 빠져보인다. 희미한 패배감과 무력감이 공기처럼 떠돌고 있다.

전작들보다 훨씬 애상적이며 정에 이끌려 행동한다.


대놓고 여자에게 추근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데- 필립 말로 역사상 처음이다- 사건 의뢰를 맡긴 변호사의 비서 버밀리아를 보자마자 경박한 수작을 건다. 소설 도입부부터 시작되는 버밀리아의 멋진 외모와 다리에 대한 묘사. 그리고 말로의 저급한 농담, 버밀리아의 반격. 멋진 남자, 필립 말로를 좋아했던 독자들은 소설 초반부터 당황한다.


필립 말로의 팬들에게 <원점회귀>는 흑역사로 취급된다. 전작까지 필립 말로는 여성과 로맨스는 있을지언정 잠자리는 갖지 않았다. 그게 필립 말로의 멋이고 프라이드였다. 하지만 <원점회귀>에서는 그렇지 않다. 말로는 여주인공 베티 메이필드와 로맨스를 넘어, 잠자리를 갖는다. 앞서 추근댄 비서 버밀리아는 말할 필요도 없다.


말로와 버밀리아는 몇 번의 저급한 농담과, 실랑이 끝에 그녀의 집으로 간다. 그리고 이어지는 사랑의 순간들. 잠자리 후 침대에 나란히 누워, 버밀리아는 이렇게 말한다.


완벽한 순간은 결코 두 번 오지 않지만, 우리에겐 그 순간이 너무 빨리 와버렸잖아요
앞으로 다시는 당신을 보지 않을 거고 보고 싶지도 않아요. 영원히요. 그렇지 않다면 한순간도 잊지 못할테니


버밀리아는 일어나 집안의 불을 켜고, 택시를 부르고, 필립 말로를 내보낸다. 그리고 두 사람은 다시는 만나지 않는다 -적어도 소설 속에선- 완벽한 순간을 끝으로 두 사람은 이별한다.


나는 버밀리아의 태도가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사실 그녀는 소설 흐름상 등장하지 않아도 상관 없는 역할이다. 말로와 잠자리를 가질 필요는 더더욱 없다. 그녀를 일부러 등장시킨 건, 버밀리아의 입을 빌려 작가 레이먼드 챈들러가 묻고 싶은 질문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에 완벽한 순간이 찾아온다면, 그 이후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버밀리아의 대답> 완벽한 순간 이후, 사랑은 하염없이 내리막길. 지금 이별함으로써 완벽한 순간을 영원한 추억으로 간직할 것.


<또다른 대답> 완벽한 순간 후에도 또다른 완벽한 순간은 찾아 올 것. 묵묵히 사랑을 이어나가며 기다리고 또 기다릴 것.


<제 3의 대답> 과연 사랑에 완벽한 순간이라는 게 존재하긴 한 것인가?



난 특히 결혼을 선택한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들은 완벽한 순간이 왔기 때문에 결혼을 한 것일까? 아님 결혼 후 완벽한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결혼을 한 것일까? 아님 그런 생각은 아예 해보지도 않았을까?


사랑과 결혼에 대한 질문만 하염없이 많아지는데 - 질문만 많으면 결국 전 결혼 못하겠죠 - 이제 질문은 그만하고 답을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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