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어 회화를 잘 못한다. 제 3자의 눈으로 봐도 그렇고 스스로 아무리 후하게 쳐줘봐야 ‘중하’ 정도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영어 교육을 받았고, 한때는 텝스나 토익 같은 어학 시험에서 고득점도 받아 봤다. 하지만 영어 회화 능력은 부끄러울 정도로 형편없는 편이다.
무슨 일이 있어 외국인과 영어로 얘기해야 할 때면 내 머릿속 팀워크는 박살이 난다. 뇌는 ‘이렇게 말하라’고 지시를 내리는데 입은 전혀 따라가지 못한다. 무의미한 “아, 아, 음..”만 반복된다. 뇌와 입의 부조화에 애꿎은 등만 축축이 젖어간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내가 영어 회화가 서툰 건 당연한 일이다. 나는 한국어 회화에도 서툴기 때문이다. 정말 편한 자리와 사람이 아니면, 3 문장 이상을 유창하게 말하지 못한다. 적당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 뭐였더라, 그거 있잖아요’를 반복하고 대부분의 문장은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한 채 얼버무려진다.
특히 업무상 전화 통화를 해야 하는 경우 심각한데, 전화를 끊고 내용을 복기해보면 늘 후회가 밀려온다. 의도는 전달했더라도 표현이 심각하게 서툰 경우가 대부분이고 어떤 경우엔 아예 엉뚱한 말을 하기도 한다. 이처럼 한국어에도 서툰 인간이 영어를 술술 잘하길 바란다는 건 너무 큰 욕심이다.
영어회화에 관한 근본적인 착오는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말이라는 건 처음부터 잘하게 타고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뉘어 있다. 운동 재능, 공부 재능, 돈 버는 재능이 따로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말 재능’을 타고나지 못한 사람은 제 아무리 영어 회화에 매진해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영어 회화를 후천적으로 습득할 수 있는 기술로 생각하는 것 같다. 젓가락질이나 운전처럼 -규칙을 기억하고 경험을 쌓으면- 누구나 습득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영악한 영어회화 업체들은 이런 믿음을 이용해서 ‘뇌 XX 기억법’이니 ‘몇일 공부법’이니 온갖 기술을 내세워 사람들을 유혹한다.
내가 영어 회화 업체의 영업에 시비를 거는 건 아니다. 다만 말하고 싶은 건 ‘테크닉’을 강조해서 누구나 영어회화를 잘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일부 재능 있는 사람들은 ‘테크닉’을 익히는 것만으로도 영어 회화에 능숙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재능 없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슬프지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영어 회화를 잘할 수 있을까. 영어회화에 서툰 내가 이 질문에 답변할 자격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 생각은 이렇다.
영어 회화를 잘하게 되는 핵심은 바로 ‘편안함’이다.
촬영 때문에 이탈리아 베로나에 간 적이 있다. 낭만의 도시로 유명한 베로나 외곽의 한적한 전원주택.
집 앞엔 드넓은 포도밭과 와이너리가 펼쳐져있고 그곳엔 동화처럼 백발의 의사 부부가 살았다. 부부가 사는 주택 일부를 빌려 촬영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계속 그들과 의사소통할 수밖에 없었다.
“Oh, Mr. Can you speak English?”
옆에 이탈리아어 통역사가 있는데도 의사 남편은 영어로 말하는 걸 ‘정말’ 좋아했다. 그는 영어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난 게 너무 즐거운 듯- 난 그런 사람이 아닌데도- 자신의 집을 영어로 소개하고 또 촬영에 대해 끊임없이 영어로 질문했다.
그런데 그 양이 정말 어마어마했다. 그는 집안의 역사부터 시작해서 집안에 놓인 가구와 미술 작품의 가치에 이르기까지 정말 끊임없이 영어로 떠들어댔다. 나는 그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적당히 영어로 호응을 해주었는데 죽을 맛이었다. 영어도 서툰데 하필 투머치 토커를 만나다니- 잘못된 만남이 몇 시간쯤 계속되자 결국 나는 그를 피해 적당히 도망 다녔다.
그런데 반전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베로나의 역사에 관한 영어 인터뷰-방송에 내보낼 용도-를 요청했다. 마이크를 차고 카메라 앞에 서자 놀랍게도 그가 영어를 더듬기 시작했다. 자주 단어를 잃어버렸고 대부분 문장을 온전히 마무리하지 못했다. 아마 카메라 인터뷰라는 불편한 상황이 그의 영어 회화 능력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친 모양이었다.
결국 우리 촬영팀은 그에게 이탈리아어 인터뷰를 요청했다. 영어보다 빠르고 굳센 이탈리아어가 입에서 흘러나오고, 그의 표정도 한결 편안해 보였다. 아까보다 훨씬 유창한 말투로 베로나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렇게 무사히 인터뷰는 끝이 났고, 그는 환한 표정으로 다시 내게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 나는 도망쳤다.
우리가 영어 회화에 서툰 것은 능력의 문제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편안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어와 한국어는 어순이 정반대이기 때문에, 영어로 말을 할 땐 어순부터 신경 써야 한다. 영어와 어순이 비슷한 라틴어족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등)에 속한 사람들이 우리보다 영어를 쉽게 배우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게다가 아무리 영단어를 외워도 상황에 맞는 영단어가 쉽사리 떠오르지도 않는다. 또 콩글리쉬는 얼마나 또 어찌나 많은지- 콩글리쉬라는 지뢰를 피해 제대로 된 영어 표현도 찾아야만 한다. 우리가 영어로 말을 하기 위해선 이처럼 넘어야 할 장애물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이러한 장애물을 자연스럽게 쉽게 넘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어학 재능이다. 이런 어학 재능에 대한 고려 없이 영어를 습득할 수 있는 테크닉으로 생각해왔기 때문에, 우리는 여태껏 수많은 시간과 돈을 낭비해온 것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영어 회화 교육이 영어에 대한 편안함을 가져다주는 쪽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믿는다. 각자 주어진 어학 재능과 요구 수준에 맞춰 딱 필요한 정도만 이뤄져야 한다. 모두가 유창한 영어 능력자가 될 수도, 될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영어를 기술로 접근해서 모든 사람이 이 정도 수준은 될 수 있다고 선전하는 업체들은 좀 망했으면 좋겠다.
참고로 내가 가장 영어를 잘했던 순간: 20대 초반, 배낭여행을 다니던 시기. 라오스 시골의 새벽 클럽. 만취한 내가 영어로 외국인들과 그렇게 얘기를 나누고 다녔다는 친구의 증언. 역시 나는 만취해야 영어가 편안해지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