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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은표 Jul 07. 2024

빼앗긴 애도

사람들이 자신을 밝히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세상을 꿈꾸면서

  네가 죽은 채로 발견된 지도 일 년이 지났다.

  자취방 구석 벽장 안에 자신을 가두고 쫄쫄 굶어 죽었댔지. 그전까지 나는 사람이 그런 방법으로 죽음을 택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그렇게 끔찍하게 갈 줄은 더더욱 몰랐다. 너는 죽은 후 일주일이 지나서야 발견되었고, 네가 그렇게 죽어서 말라비틀어진 걸 집주인이 와서 보고 까무러쳤다지. 뉴스며 온갖 포털 사이트에선 젊은 청년의 고독사, 혹은 자살에 대해 한참 떠들어댔다. 정작 너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주먹만 말아 쥐었지.


 나는 정말로 너에 한해서는 모든 걸 기억한다. 너는 라떼 커피를 가장 좋아했는데, 우유를 못 받는 체질 탓에 우유 대신 두유를 타 마셨지. 나는 아직도 카페에 가서 라떼를 시킬 때면 우유를 두유로 바꾸어 시킨다. 너는 이제 가고 없는데 너의 입맛만 남았구나.


  나는 정말로, 정말로 그 누구보다 너를 잘 안다. 어린 시절 우리는 두려울 것이 없었고, 사랑하는 일은 그 무엇보다 쉬워 보였지. 너는 갓 사랑을 깨달은 어린아이 와도 같았고, 자신의 관심사나 연구 주제에 한해서는 열정적인 학자와도 같았다. 너는 내가 정신 나간 몽상가라고 불평했고, 그럴 때마다 나는 냉정한 너를 이해하려 노력했지. 우리는 젊은 시절 청춘을 다 바쳐 서로를 연구했는데 그 시절 너는 나에게 영혼의 반쪽 그 이상이었다.


  네 장례식에도 나는 떳떳하게 얼굴을 비출 수 없었다. 너희 가족들에게는 아직도 내가 자식 잡아먹은 사탄일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그저 문간에 서서, 새카만 한복을 입고 그보다 더 까만 머리칼은 쪽 져 올린 너희 어머니가 당신의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연신 중얼거리며 자신의 신을 찾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참 웃기지 않니?

장례식장 문을 나서며 나는 생각했다. 나는 네가 처음으로 쓴 연애편지를 누구에게 부쳤는지, 네가 누구로부터 처음 사랑을 배웠는지도 안다. 그리고 너희 어머니가 절대 입에도 올리지 않을 그 첫사랑의 이름도 안다. 그 이름 석 자는 내 이름과 무척 닮았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너의 빈소 앞에 한 발도 들여놓지 못했지. 너와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지만 나에게는 애도할 권리조차 없구나. 그리고 그 빼앗긴 애도(哀悼) 할 권리가, 사랑하는 방법이 달랐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퍽 우스웠다.


  인터넷 자판 너머의 사람들이, 너에 대해 저들끼리의 언어로 토론할 때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았는지 아니? 어쩌면 우리는 그들 말대로 그저 혼란스러웠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또 누가 말하는 것처럼 미쳤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하다. 너와 나는, 성별이 같았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여느 다른 연인들과 다르지 않았는데. 우리가 정말 더러운 사람들이었을까? 너는 정말로 자신이 너무 더러워 참지 못했던 걸까? 그렇게 자신을 끔찍하게 벌주는 방법으로 세상을 등질만큼? 묻고 싶은 것도, 답하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나는 그 무엇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지.


신이나 사후세계 같은 거 나는 믿지 않는다. 그 보이지 않는 신을 숭배한다는 사람들이, 눈앞에 버젓이 존재하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세상에서 없애 버리는 일을 너무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지. 우리는 그들에게 항상 신이 버린 자식이었고 사탄이었다. 내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노려보다가 끝끝내 울음을 터뜨리는 밤마다 그들에게 따져 묻고 싶었지. 우리는 신의 자식이 아니었냐고. 무얼 위해 그렇게까지 해야 했냐고. 또 우리가 무얼 그렇게 잘못했길래 나에게서 슬퍼할 자격마저 박탈해가야 했냐고.


  그래도 만약 네가 죽음 뒤의 세계에 가 있다면 묻고 싶다. 이제는 행복한지. 잃어버렸던 자신을 찾았는지, 혹은 네가 누구였는지를 벽장에 들어가던 그때 완전히 잊어버렸는지. 떠날 때 무섭지는 않았는지.


어찌 되었든 네가 마침내 편해졌기를 바란다.


그리고 만일 그곳에서 신을 만나거든 절대 용서하지 말아라.



영어 숙어 표현 Come out of closet에는 다른 뜻으로 "성소수자가 커밍아웃하다"라는 뜻도 있다.




창작 노트

참고 자료: 애인이 죽었는데 조문도 못해… 슬픔마저 빼앗긴 성 소수자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4308.html


  학창시절, 점심을 먹고 나서 친구들이랑 산책하는 것이 루틴처럼 굳어졌던 여름이 있었다. 햇볕이 뜨거워 그것조차 하지 못할 적에는 다 같이 도서관엘 갔다. 거기서 우리는 다양한 일에 대해 실없이 상의하며 한참을 웃었다. 도서관에서는 조용히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작은 목소리로 말하려 해도 친구들이 원래 성량이 큰 탓에 항상 잘 되진 않았다.


  때때로 자신을 견디는 일이 무척 힘들 때는 도서관에서 조차 친구들과 거리를 두려 했다(어리석은 나). 그런 거리가 필요할 때 나는 잡지를 읽었다. 도서관에서 구독 중인 잡지 중 하나를 골라 읽을 때면 친구들이 조잘대는 소리가, 참을 수 없는 나 자신이 멀어지는 것도 같았다. 어느 날엔 잡지사 한겨레 21의 잡지를 읽었다. 표지에 적힌 칼럼의 제목에 눈길이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그때 읽은 그 칼럼이 바로 위 링크 속 기사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살했는데 슬픔을 빼앗긴 사람들이 있다. 의미 있고 중요한 관계에 있는 대상을 잃었지만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거나 공개적으로 애도할 수 없는 이들이다. 이성애만이 ‘정상’으로 취급되는 사회에서 성소수자는 이중삼중의 낙인을 경험한다. 이들은 반려자를 잃었음에도 법적 가족이 아니기에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등 슬픔이 사회로부터 무시된다. 슬픔의 우열을 나누려는 시도는 고통에 고통을 안겼다. 부모·형제자매·자녀 등 법적 가족의 슬픔이 더할 것이라는 인식은 연인과 친구 등 가족 외 관계의 슬픔을 뒷전으로 미뤘다. 인정받지 못한 슬픔은 혼란·분노·우울·불안의 감정으로 이어지기 쉽다. 연인을 자살로 잃은 이는 자살을 더 많이 시도했다. ―편집자 주”


  그날 밤 꿈속에서 한 청년이 벽장에 자신을 감금해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를 읽었다. 벽장 안에서 나오다 (come out of closet), 영어권에서 이 구절은 비밀을 밝힌다는 뜻과 함께 성 소수자가 자신을 드러낸다는 뜻의 관용구로 쓰이기도 한다는 사실을 나는 진즉에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꿈으로 뭘 해야 할지도 알고 있었다.


며칠 전 대전에서 축제가 열렸다고 들었다. 동시에 그에 반대하는 집회가 함께 열려 경찰과 함께 충돌했다고. 자신의 아이가 어떤 모습이든 사랑스럽다고 밝히는 한 어머니의 모습과, 자연스럽지 못한 사랑은 우리 아이들을 위한 올바르고 건강한 미래를 만들기 위해선 금지되어야 한다고 밝히는 다른 어머니의 모습이 텔레비전에 보였다.


  나는 아마 소수자들의 고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거다. 그들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되기 전까지는 내가 가지는 한계가 있겠지. 그걸 알기에 쓰면서도 조심스러웠다. 내가 그들의 입장을 감히 대변해서는 안 된다는 불안도 있었고, 미안함도 있었다. 그래도 차가운 세상에서 잊힌 사람들을 생각해 보는 것이 나의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밝히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세상을 꿈꾸면서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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