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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흔적

서점 이야기 1 - 렐루 서점의 마법

by 트릴로그 trilogue

포르투는 단순히 아름다운 도시를 넘어, 미식과 미학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특별한 경험을 하게 해주는 곳이다. 붉은 지붕이 그림처럼 펼쳐진 언덕, 도루강을 가로지르는 웅장한 다리, 그리고 미로처럼 얽힌 골목마다 숨겨진 이야기는 여행자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포르투 대성당과 주교관 그리고 히베이라 광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는 눈으로 즐기는 아름다운 건축물과 예술 작품, 혀로 맛보는 깊이 있는 포트 와인과 다채로운 미식, 그리고 피부로 느껴지는 도시의 활기찬 에너지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오감을 만족시킨다.

골목 식당과 계단을 메운 사람들

렐루 서점의 고풍스러운 아름다움부터, 수백 년의 역사를 품은 포트 와인의 깊은 맛, 그리고 활기 넘치는 거리 곳곳에 숨겨진 현지인들의 맛집까지. 포르투가 지닌 다채로운 매력을 탐험하며, 오감 만족의 여정을 즐겨 보았다.


렐루 서점, 마법적 공간


포르투의 좁고 구불구불한 돌길을 걷다 마주한 렐루 서점(Livraria Lello)은 단순한 책방의 경계를 뛰어넘는다. 고딕과 아르누보 양식이 직조해낸 독특한 건축미로 전 세계인의 발걸음을 이끄는 이곳은, 하나의 아름다운 미스터리를 품고 있다.


렐루 서점이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조앤 K. 롤링의 《해리 포터》 시리즈와의 연관성 때문이다. 스물네 살의 롤링이 포르투갈에서 영어 강사로 일하며 이곳을 자주 방문했고, 서점의 붉은 나선 계단에서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움직이는 계단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졌다. 이 매혹적인 이야기는 전 세계 해리 포터 팬들을 포르투로 불러 모았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정작 롤링 본인은 렐루 서점에서 《해리 포터》의 직접적인 영감을 받았다고 언급한 적이 없다고 한다. 2020년, 그녀는 트위터를 통해 더욱 명확히 선을 그었다. "렐루 서점에서 영감을 받은 적이 없으며, 심지어 들어간 적도 없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것이다. 포르투 거주 당시 서점의 존재조차 몰랐다는 그녀의 증언은 오랫동안 회자되던 낭만적 이야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렐루 서점 측의 반응은 참으로 시적이었다. 그들은 "한 번도 렐루 서점을 방문하지 않은 누군가에게 보내는 공개 편지"라는 제목으로, 문학이란 작가의 실제 현실을 넘어선 진실을 담는다는 움베르토 에코의 말을 인용하며 이 상황을 받아들였다. "수만 명의 J.K. 롤링 독자들이 렐루 서점을 방문하며 해리 포터의 세계를 발견했다"는 그들의 말에는 진실보다 아름다운 상상력의 힘에 대한 믿음이 담겨 있다.


이 모든 논란을 떠나, 렐루 서점 자체가 이미 충분히 마법적인 공간이다. 1869년 프랑스인 에르네스토 샤드롱이 문을 열었던 이 서점은 렐루 형제의 손을 거쳐 1906년 현재의 모습으로 재탄생했다. 건축가 프란시스코 자비에르 에스테베스가 설계한 건물은 네오고딕과 아르누보 양식의 절묘한 조화를 보여주며,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결국 렐루 서점과 해리 포터의 연관성을 둘러싼 미스터리는 오히려 이 공간만의 독특한 매력을 더해준다. 진실 여부를 떠나, 이곳을 찾는 수많은 방문객들이 각자의 마법적 경험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전날 정전으로 운영이 중단된 서점 앞에서 문의하는 사람들


포르투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 8시 45분, 우리는 다시 서점으로 향했다. 흔히 '오픈런'이라 불리며 인파가 북적이는 풍경을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미리 예약된 시간에 맞춰 줄을 서서 입장하는 방식이었다. '먼저 온 사람이 먼저 들어간다'라기보다는 "예약한 시간에 정해진 자리에서 차례를 기다린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덕분에 혼란스러움 없이 질서정연하게 입장을 기다릴 수 있었다. 좁은 서점 앞 인도에는 이미 몇몇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이른 아침의 포르투는 놀랍도록 차분했다. 회색빛 돌담 위로는 부드러운 햇살이 내려앉아 고즈넉한 도시에 따스한 기운을 더했다.


서점 외벽 앞에서는 설렘 가득한 얼굴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 사이로, 이곳을 오랫동안 기다려온 기대감이 물씬 풍겼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중 한 곳으로 꼽히는 이곳에 대한 설렘과 경외심이 그들의 눈빛에 교차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의 고요함과 예약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질서정연한 분위기는 우리 모두에게 특별하고 경외로운 경험을 예고하고 있었다.

다음 날 다시 찾은 입장 직전의 모습


정각 9시, 낡았지만 웅장한 나무 문이 천천히 열렸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차분하게 서점 내부로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마치 마법의 세계로 들어서는 듯한 신비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모두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기대감이 어렸다.


문턱을 넘어서자 전날의 아쉬움은 금세 사라졌다. 붉은 나선형 계단은 생각보다 낮게, 부드럽게 휘어 있었고,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온 아침 햇살이 계단과 공간을 온통 감싸고 있었다. 입장과 동시에 줄을 서서 나선형 계단에서 인증사진을 찍느라 조금은 소란스러웠지만, 그 또한 이곳만의 특별한 의식처럼 느껴졌다. 우리 역시 차례에 맞춰 그 소중한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입장 직후 직관한 렐루 서점의 나선형 계단
렐루 서점 2층의 모습


1층 바닥에는 과거 책 운반용 수레가 오가던 곡선 레일이 그대로 남아있어 서점의 독특한 멋을 더한다. 천장까지 닿은 갈색 서가와 중앙의 붉은 계단은 고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아르누보 스타일의 식물 모양 조각들이 벽면을 빈틈없이 채운다. 서점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19세기 유럽 저택으로 시 여행을 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


바닥 왼쪽에 보이는 책운반용 레일이 인상적이다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을 밟으며 책들 사이를 거닐면, 낡은 종이와 나무의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특히 '꿈의 계단'이라 불리는 붉은 나선형 계단은 그 자체로 예술 작품이다. 계단을 따라 오르는 사람들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고, 이곳이 왜 전 세계인들의 발길을 이끄는지 절로 이해하게 된다.


고서부터 현대 문학, 여행서까지 빼곡한 서가 사이를 걷다 보니, ‘책을 파는 공간’이라는 사실도 잠시 잊게 되었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수도원 비망록(Memorial do Convento)』 양장본을 찾아봤지만, 아쉽게도 페이퍼백만 있어 대신 포르투의 건축과 역사를 다룬 영문 에세이 한 권을 골랐다. 이 책에 담긴 도시의 모습이 이 공간에서의 추억을 오래도록 간직하게 해줄 것 같았다.


렐루 서점은 방문자 입장료를 2015년 7월부터 받기 시작했는데, 그 목적은 지나치게 많은 관광객을 관리하고, 보존 및 복원을 위한 재원 마련에 있었다. 우리는 실버티켓을 1인당 10유로에 구입했었는데 책을 사면 그대로 할인해주는 일종의 바우처 개념의 입장료인 셈이다.


좋아하는 작가들의 공간
렐루 서점에서 구입한 책과 예전에 산토리니 아틀란티스 북스에서 구입했던 '그리스인 조르바'
구입한 책이 쌓여 있는 공간


영국 가디언지가 선정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렐루 서점이 이제 나의 '가본 곳 리스트'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10년 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엘 아테네오 그랜드 스플렌디드, 그리고 2018년 산토리니 섬의 아틀란티스 북스에서 느꼈던 특별함과는 또 다른 매력이었다. 오페라 극장을 개조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서점이 웅장함으로 압도했다면, 에게해 절벽 위 피라 마을에 자리한 산토리니의 서점은 낭만으로 사로잡았다. 그리고 포르투의 렐루 서점은 마법 같은 신비로움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엘 아테네오 그랜드 스플렌디드
산토리니 아틀란티스 북스


오픈 직후 수많은 인파로 북적였음에도 불구하고, 렐루 서점은 묘하게 차분하고 정적인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인증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다소 복잡했지만, 대부분의 방문객들이 이 공간의 마법에 매료되어 그 아름다움에 잠겨 있는 듯했다.


렐루서점의 책
서점 내부의 아름다운 모습
천장 중앙에 라틴어로 "노동의 존엄"을 의미하는 “Decus in Labore”가 선명하다.

포르투에서 보낸 하루는 렐루 서점의 기억을 중심으로 점점 넓어졌다. 동루이스 1세 다리 난간에 기대어 도루강 물결을 바라본 순간, 저녁 무렵 히베이라 골목에서 맛본 해물밥과 문어요리, 포트 와인의 진한 향기, 세라 두 필라르 전망대에서 석양으로 물든 도시를 내려다본 기억까지. 포르투는 마치 한 권의 큰 책 같았다. 골목마다 각기 다른 이야기들이 숨 쉬고, 다리와 언덕, 강이 그 이야기를 이어 주었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내가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렐루 서점에서 시작된 작은 마법은 도시 전체로 퍼져 나갔고, 여행을 마친 뒤에도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았다. 언젠가 다시 포르투를 찾게 된다면, 서점 앞에 서서 첫 장을 넘기듯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포르투는 언제나 또 다른 여행을 기다리며, 붉은 지붕 아래서 조용히 시간을 쌓아가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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