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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씨 Oct 10. 2016

블레드 - 노를 저어라

홍씨의 세그림. 27화

 내겐 사나이에 대한 이상한 선입견이 있다. '사나이는 장작을 잘 패야 한다', '사나이는 장작에 불을 잘 지펴야 한다', '턱걸이를 잘해야 한다', 뭐 이런 것들. 정말 근거없고 터무니 없는 생각이란 것은  잘 인지하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저런 조건들에 부합하느냐? 그것도 아니다. 다만 왠지 그래야할 것만 같다. 아니, 그러고 싶다. 


 '노 젓기'도 그 이상한 선입관 중 하나다. 덕분에 호수나 강, 개천 등지에 놀러가 배를 보게 되면 꼭 배를 빌려 타는데, 슬로베니아 북서부의 블레드(Bled)에서도 역시나 그랬다. 청록색 물빛의 빙하호, 블레드 호수. 작은 물고기들이 햇살을 피해 나무 그늘로 모여들고, 몇몇 오리들은 그 위에서 한가로이 발발댄다. 뭘 그리도 먹으려는지, 연신 물 표면에 입질을 해대는데, 그 '찹찹'대는 소리가 듣기 좋다.


 덩치가 크고 새하얀 고니들은 조금 더 여유롭다. 몇몇은 호수위를 동동 떠다니고, 몇몇은 땅 위에서 다리를 내어준 관광객들의 바지를 꽉꽉 물어댄다. 지나가는 모두가 그 모습에 깔깔대며 즐거워한다.


 배를 빌리고, 조심스레 올라탄다. 미씽은 뒷편에 앉아 정면을 보고, 나는 가운데 앉아 뒷쪽을 보고 앉아 양손에 노를 잡는다. 노질은 언제나 익숙치 않지만, 항상 즐겁다. 물에 잠긴 노를 조심스레 당긴다. 배가 앞으로 미끄러진다. 노를 수면으로 꺼낸 후 손잡이를 밀어내고, 다시 물 속에 넣어 당긴다. 노 고리의 삐걱이는 소리, 노가 물을 헤치는 소리, 그 소리를 타고 배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노를 저어라!


 이 배는 어디서 왔을까? 깊은 숲 속에서 자란 나무였을지 모르겠다. 아니면 어떤 호숫가에서 자랐을 수도 있다. 나무는 목수에 의해 목재로 가공되었고, 배 건조 장인의 손으로 넘겨졌다. 장인은 한번 더 나무를 다듬었다. 그리곤 뼈대를 먼저 만들었다. 공룡이나 기타 큰 동물의 뼈대 같은 모양이다. 그 위에 외장을 입히니, 서서히 배의 형태가 드러난다. 모두를 하나로 잇고, 틈새로 물이 스미지 않도록(혹은 최대한 덜 스미도록) 어떤 방수성/접착성을 지닌 물질을 발랐을 것 같다. 겉과 속에도 칠을 했겠다. 사실 난 선박 건조 과정을 전혀 모르기에 인터넷을 뒤져봤지만 정확한 과정을 찾진 못했다. 그래서 대강 생각해 본 과정이다. 맘에 든다.


 초보자가 노를 너무 힘차게 오래 젓다보면 손에 작은 물집이 잡힐 수 있다. 그랬던 기억이 몇차례 있다. 그래서 이번엔 조금 여유 있게 저었다. 호수 중심으로 나아가니 물은 짙은 청록색이 되었다. 아래에 뭐가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깊은지 몰라 구명조끼를 바라보았다. 호수 한켠의 작은 블레드 섬에는 15세기에 지어졌다는 교회가 있다. 호숫가엔 몇개의 언덕이 있는데, 그 중 가장 높고 가파른 언덕 위에는 블레드 성이 자리잡아 호수를 내려다 본다. 아마 천년 정도 되었다고 들은 것 같다.


 미씽은 선장이 되어 장난스레 배의 갈 길을 알려주었다. 

 "저쪽 방향이다!"

 "너무 이쪽 방향이잖아! 혼나볼래!?"


 어설픈 선장과 초보 사공의 노력으로 배는 즐겁게 항해를 완수해냈다. 미씽은 재미있다는 말을 몇차례 하며 성공적 항해를 자축했고, 나는 사나이의 덕목에 한발짝 다가섰음을 느끼며 뿌듯해 했다. 언젠가는 배를 건조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한번쯤 밤새도록 호수 위를 떠다니고 싶기도 하다. 그러면서 별을 보고 싶다. 과연 그런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노질은 계속해서 이어져야한다. 언제까지고 쭈욱.



※ 그동안의 경로

1. 한국 : 출발

2. 태국 : 푸켓 -> 방콕

3. 캄보디아 : 씨엠립

4. 태국 : 방콕 -> 치앙마이 -> Elephant jungle sanctuary -> 빠이 -> 치앙마이

5. 미얀마 : 만달레이 -> 바간 -> 인레호수 -> 양곤

6. 중국 : 쿤밍 -> 리장 -> 호도협 트레킹 -> 샹그릴라 -> 메리설산(페이라이스) -> 리장 -> 시안 -> 베이징

7. 몽골 : 울란바토르 -> 몽골 투어(고비, 중앙) -> 울란바토르

8. 탄자니아 : 잔지바르 -> 아루샤 -> 세렝게티 국립공원 -> 아루샤

9. 짐바브웨 : 하라레 -> 불라와요 -> 빅토리아 폴즈

10. 잠비아 : 리빙스톤

11. 나미비아 : 빈트후크 -> 나미브사막(세스리엠) -> 월비스베이 -> 스와콥문드 -> 스켈레톤 코스트 -> 에토샤 -> 빈트후크

12. 남아공 : 케이프 타운 -> 허머너스 -> 모슬 베이 -> 가든루트 -> 포트엘리자베스 -> 블롬폰테인

13. 레소토 : 세몬콩(+모리자)

14. 남아공 : Karoo national Park -> 플래튼버그 베이 -> 나이스나 -> 케이프타운

15. 이탈리아 : 밀라노 -> 베로나 -> 베네치아

16. 슬로베니아 : 류블랴나 -> 블레드 당일치기

17. 크로아티아 : 자그레브 -> 오토챜 -> 코레니카(플리트비체)


아래엔 물고기들이 숨어있다
너의 바지는 내가 접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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