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웠나?
리그 오브 레전드 아이디를 지웠습니다.
게임에 시간을 너무 많이 썼고, 앞으로도 많이 쓸 것 같아서 지워버렸습니다. 어느 사이트를 통해 알아본 결과, 제가 이 아이디로 약 2,200시간을 게임을 하는데 썼습니다. PC방 이동 시간 + 통계에 잡히지 않은 프로게이머 준비생 시절의 스크림(연습경기) 시간 + 부계정 플레이 시간 등을 전부 합치면 2,200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롤에 썼을 거예요.
약 2,200시간의 플레이 타임은 최근까지도 현재 진행형으로 쌓이고 있었죠. 이젠 더 이상 롤에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시간에 다른 것들도 좀 해보고 게임을 해도 다른 게임을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관성의 법칙은 게임에도 통하는 법칙인가 봅니다.
아이디가 계속 남아있으니, 여태까지 게임을 즐겼던 습성을 못 버리고 계속 롤에 접속을 하게 되더라고요. 제가 확실히 게임 상대로는 의지박약 속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환경을 만들어버렸어요. 아예 못하게요.
앞서 아이디를 지운 이유를 단순하게 '더 이상 롤에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아서'라고만 말씀드렸었는데요. 그냥 게임을 안하면 되지, 왜 아이디까지 지웠는지 세부적으로 따져보면요.
금연을 시도해보신 분들은 공감 하실 수도 있겠네요. 의지로는 힘듭니다. 지금처럼 글을 쓴다든지, 운동을 하러 간다든지, 뭐 좀 다른 거를 해보려고 했을 때 롤이 항상 발목을 붙잡았었습니다. 게임을 안 하려고 의지를 불태워도, 얼마 뒤 친구와 롤을 즐기고 있는 제 자신을 볼 수 있었죠.
처음에는 게임을 안 하겠다는 의지 하나만으로는 안돼서, 환경을 만들어보려고 했어요. 친한 친구한테 계정 비밀번호를 임의로 바꿔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한테는 알려주지 말라고 당부를 했죠. 이제 제가 계정을 쓰려면 게임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비밀번호 찾기를 하는 귀찮은 과정을 거쳐야 하죠. 친구와의 신뢰도 약간은 깼어야 했습니다. 게임 안 한다고 비밀번호를 바꿔 달라했는데 약속을 어기고 게임을 하는 거니까요.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요?
이걸로 해결됐으면 제가 아이디를 지울 일이 없었겠죠?
당연히 20대의 나이는 쌩쌩한게 맞습니다. 그런데 게임 내에서 열심히 치고 올라오는 00년대 생들의 실력, 피지컬과 화려함을 따라갈 수는 없더라고요. 이 친구들과 경쟁해서 게임을 열심히 해도 상위 등급으로 올라가서 보상을 얻는 등의 기대를 가질 수 없었어요.
저도 10대~20대 초반에 게임을 했던 만큼 더욱 열심히 하면 게임 실력을 전성기 때만큼 끌어올릴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때처럼 즐겁다는 감정을 더 이상 못 느꼈고
학창 시절에는 남자 애들한테 인기(?)라도 얻었지, 이젠 더 이상 게임 등수가 높다고 해서 얻는 게 없었고
예전처럼 게임에 시간을 쓰기엔 현실을 살아야 하고
저의 게임 재능으로 갈 수 있는 단계까지는 충분히 갔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더 이상 이 게임을 할 이유가 없는 거죠. 재밌지도 않고, 스트레스만 더 받고, 다른 거 할 거는 많고, 등수는 올라가지도 않고, 취미로 하기엔 중독성이 너무 심했습니다.
삭제 직전에 슬픈 감정이 들었던 이유는 과거의 저를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고작 게임 아이디 하나를 지우는 거였지만 그 계정에는 고작 게임 아이디,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있었어요.
제가 10대~20대 초반에 저의 미래를 상상했을 때, 분명 지금처럼 게임 아이디를 삭제하는 모습을 기대하진 않았을 거예요. 최소한 A급 프로게이머로 활동하면서 페이커처럼 슈퍼스타가 되는 이미지를 그리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페이커보다 재능이 부족했었죠. 상위 0.1%까지 갈 수 있는 재능은 있었지만 프로게이머의 영역인 상위 0.001%의 재능은 없었습니다. 이래 봬도 소수점 몇 단위 차이지만 꽤 커요. 수능 1등급과 수능 만점자의 차이랄까요.
무엇보다 과거의 저한테 가장 미안함이 들었습니다. 프로게이머라는 꿈을 이루지 못했으니까요. 그렇다고 게임에 계속 발목이 잡힐 수는 없었어요. 과거는 과거일 뿐. 앞으로 저의 타이틀에는 다른 이름이 들어가야겠죠.
의외로 계정을 지우고 난 뒤에 허무하거나 후회감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탈퇴 직전엔 많이 슬펐는데 말이죠.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여드름 하나를 완벽하게 짜낸 후련한 느낌이 들어요.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여러분들도 만약 게임이 발목 잡고 있다면, 과감하게 아이디 삭제하시는 것을 추천드려요. 앞길을 막고 있는 건 치워버리는 게 맞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길로 나아가셔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