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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두달홍천살이 Aug 30. 2020

[나의 단편 소설] 좁은 방 작은 어깨

어느 독거노인 할머니의 기구한 삶의 이야기를 듣다  

 

한창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이었다.


나는 봉사 시간이나 채울 생각으로 걸어서 한 할머니께서 사신다는 작은 집으로 가게 되었다.

집의 겉모습은 이랬다. 양쪽은 빽빽하게 헌 건물들이 있었고 지붕은 아주 낮았다.


한 언니가 " 할머니 저희 왔어요." 하고 말했다.


얼마간 정적이 흐른 후 문이 열렸다.

"안녕하셨어요?" 


아래를 내려 보자 한 마르신 할머니가 다리가  불편하신지 앉아서 우릴 바라보셨다.   


" 아이고, 학상들 어쩐 일인가? " 


땅속에 있다가 나온 것처럼 너무나 반갑고 기뻐하셨다.


"어서 들어와."   


"네, 할머니"  


난  너무 어색했다. 

평소 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그리웠는데 이 할머니를 뵙자니 정겹고 마음이 편안했다.


할머니가 혼자 지내시는 집의 내부는 말 그대로 혼자 살 방 하나짜리였다. 

누덕누덕한 이불들이 바닥에 깔려 있고 텔레비전 한대와 옷 몇 가지 없어 보이는 서랍이 놓여 있는 방과 

부엌처럼 보일 듯 말 듯 한 부엌이었다. 우리 모두 좁은 방 하나에 끼여 앉았다.


혼자 지내셨던 할머니께서는 할 말씀이 많으셨는지 반가워하시는 것 같았다.

얼굴에 없던 큰 웃음이 지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주름이 지긋한 얼굴에는 여태 살아온 삶의 고단함과 세월이 묻어 있었다.

뭔가 사연이 많으신 분 같았다.


" 많이 덥지? 어여 사탕들 하나씩 먹으라고. 난 잘 안 먹으니께."


우리들이 거절 하자 억지로 하나씩 손에 쥐어 주셨다.

할머니의 일용할 양식인 사탕을 뺏어 물고 있는 것 같은 죄송한 기분으로 할머니의 얘기를 가만히 들었다. 


내가 여태껏 들어온 이야기 중에서도 너무나도 가슴 아픈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너희들이 이렇게 찾아와 줘서 무척 고맙구나. 나 혼자선 너무 심심하거든.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 구경이나 하려고 낮에 가끔 나와서 의자에 앉아 있고는 하지. 

사람 말소리가 듣고 싶어서 텔레비전이라도 틀어놓고 있는 거야. 

이 늙은이가 걸어 다니 지 두 못 하고 이렇게 방에만 앉아 있으니 원. 

그러니께 너희들이 지금 내 앞에서 말 좀 많이 하라고..

난 재잘재잘 떠드는 소리를 들으면 사람 사는 것 같고 좋으니깐.


내가 내 가슴 아픈 옛이야기를 해줄게. 

모든 할머니들에게 그렇듯 내가 젊었을  때는 6 25 전쟁이었어.

우리 부부는 산꼭대기에 있는 집에 살았는데 갓 태어난 남자아이가 하나 있었지. 

내가 들려주는 그 당시의 이야기들은 너희들에게 도움이 될 거야.

내가 많이 알고 있지는 않지만 그 당시 살았던 사람이니깐. 

산속이라 인민군들이 많이 내려와서 횡포들을 부려 사람들은 거의 모두 떠난 상태였어. 

하지만 우린 갈 데도 없었고 아이도 있어서 그냥 있었어. 너무 나고 추운 겨울이었어. 


어느 날 마을에 있는 이장이 공산당 사람들에게 우리 가족이 민주주의 사상가라고 신고를 했어.

얼마나 무서웠었는지 몰라 제복 입은 그 사람들은 남편을 밖으로 끌어냈어. 그리고 두들겨 팼지. 


"넌 어느 사상을 가지고 있느냐"는 그들의 말에 그는 당연히 살기 위해 공산 사상이라고 했어. 

하지만 다 알고 있는 그들은 그를 고문했어. 

그는 죽은 것 같았지. 

순사가 마을 사람에게 한번 확인해 보라니까 그 사람이 숨은 쉬고 있는 거야.


하지만 당시 '빨간 사과'라 불리는 사람들 덕에 더한 수모는 당하지 않았어. 

'빨간 사과'라는 말은 그 당시 쓰던 말인데 것으로는 공산 사상을 가진 척하면서 속으로는 남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들이 알고 있으면 도움이 될 거란다. 


그이는 얼마 후 죽고 말았어. 

아이와 혼자 남겨진 나는 몇 날 며칠을 울어 눈이 띵띵 붓고 앞이 보이지 않았어. 

아이하고 나만 남았는데 아기에게 젖을 먹여야 했어 근데 아이가 어디 있는지를 모르겠는 거야. 

그래서 막 끌어다가 거꾸로 들고 젖을 먹였어.


마을 사람의 권유로 눈이 돌아오는데 도움이 된다는 담배라는 것을 그때부터 피우기 시작했지. 

입양을 보내라는 말에도 난 아이를 힘겹게 키웠어. 

고등학생이 된 그 애가 돈을 번다며 나갔는데 글쎄 깡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내가 어떻게 키워온 아들인데…… 


어느 날은 옷 공장에서 일하는 지보다 나이 많은 여자를 건드려서 집에 들어오더니 

애만 낳고 그년은 집을 나갔어. 

나의 손주라고 하는 남자아이를 하나 키우고 있는데, 아들은 그 여자를 데리고서 애를 하나 더 낳아 놓고는 아예 집을 나가버렸어.


난 내 두 손자들을 키워왔지. 하루 벌어먹기도 힘들었지만 무럭무럭 자라는 내 새끼들을 보고 너무나 감사했지. 앞으로도 그 애들이 잘되면 좋으련만, 그러지 못했어.

작은애는 실업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 신고식 때 학교 양아치들이 무서워 바로 뛰쳐나와 자퇴를 했어. 


큰 아이는 처음에 열심히 하다가 돈 번다며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 

그것이 그만 거기서 술도 마시고 하다가 마음에 자신의 처지에 대한 나쁜 마음들을 가진 거야. 

밤에 들어온 애는 이불속에서 매일 무언가 했어. 

이불을 걷어보고는 얼마나 배신감이 들던지! 

본드를 마시고 있었어. 

아이는 얼마 안가 머리에 이상이 와서 정신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병원비를 못 냈더니 그 병원은 신문에 우리가 받아먹기만 한다고 기사를 실었어. 

이 세상에 그런 나쁜 놈들이 있다니…


그 기사를 봤는지, 어디선가 애 어미가 남편이라는 사람과 찾아 와서는 자기가 아이를 키운다며 데리러 왔어. 

아이는

"엄마가 아빠라고 부르라는 사람이랑 왔었어.……히히 너 누구야 새끼야, 어? "  

하지만 얼마 있다 그들도 못 견디고 아이를 다시 입원을 시켰단다. 

지금 그 애가 32살이야 헌데 여태 그 가엾은 것이 아직 그 병원 안에 있어 …(눈물을 훔치신다)


가끔 아들이란 놈이 떠돌아다니면서 어머니 어떠시냐면서 전화를 해와. 

어디서 밥은 잘 먹고 댕기는지 매일 눈에 밟힌 다우. 내가 그 애 재롱떠는걸 낙으로 살았는데.


난 운도 지지리 없는 가져. 그냥 자식 손자들이랑 행복하게만 살고 싶은 게 어미의 마음이었는디.


내가 하도 적적하기도 하고 해서 근처에 교회를 다녔는데 말이야. 노래도 부르고 기도도 하고 재미있었어. 

근디 돈을 좀 내가 못 냈는데 어느 날,  내게 

"줄 줄은 몰라도 받을 줄은 알아요" 

라는 가사의 찬송가를 부르라고 시키는 거야. 

멋모르고 따라 부르다가 알아 체고 당장 그만뒀지 몹쓸 것들. 나 같은 가난한 노인네에게 그러고 싶을까.


거기 사람들이 전화가 왔어. 

"교회 안 오실 거예요? 여기 말고 가실 데 없잖아요." 


나는 화가 나서

 "갈 데가 왜 없어!! 널렸구먼!! 신경 쓰지 말라고!"  "뚝"


지금은 성당에 다녀 …(옆 액자에 들어 있는 사진을 가리키며... 할머닌 평온해 보이셨다) 

여기 사진 봐봐. 미사 했을 때인데 나 사진 찍어 주는 사람들은 여기밖에 없어. 이거 보면 기분이 좋단다.

내가 너희들에게 꼭 이야기해주고픈 것은 말이야. 열심히 배우라는 거야. 배워서 남 주는 것이 아냐. 

나 같은 사람처럼 안 살려면 열심히 공부해...

무엇보다도 너희를 끔찍이 생각하시는 부모님을 위해서도 말이야.

너희들이 행복해하는 것만 봐도 배부른 게 부모야... 잘해드려... 

요즘 애들이 예전처럼 예의 바르고 요즘 애들 답지 않고 부모 취급도 해주지들 않아. 

나중에 자기 애 낳고 길러봐 야지나 알 거야. 

꼭 너희를 낳아주신 그분들께 효도하거라 ...

이제 내 얘기 다 들어줬으니 어서 가봐라 오늘 고마웠단다.

밥도 먹고 가면 좋을 텐데 … 사탕 하나씩들 더 물어. 어서


이야기가 끝났을 때 우리 입 안의 과일 맛, 박하 맛 사탕들은 모두 녹아 목구멍을 타고 흘러간 뒤였다.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할머니, 안녕히 몸 건강히 계셔야 해요"


밝게 인사하는 언니들 곁에서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우리들은 하나씩 다시 사탕을 빨면서 걸어갔다. 

우리가 할머니의 사탕을 전부 먹었다. 할머니는 마지막 남은 가루를 입안으로 털어 넣으시며 


"난 이가 없어서 이거면 돼" 


하고 허허 웃으셨다. 


난 하루에 한 개씩 심심할 때마다 꺼내 드시던 사탕을, 

우리의 심심한 입을 위해 주신 할머니의 따뜻한 인정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솔직히 할머니의 집은 우리 집에서 불과 십 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그러면서 가까이 사시는 외롭고 적적하신 노인 분들을 한 번도 찾아뵙지 않고 

집에서 엄마를 괴롭히고 있던 내가 부끄럽고 미웠다.


우리나라는 노인이 많은 고령화 사회이다. 

혼자 사시는 독거노인 분들이 혼자 작은 방에 앉아 찬 물에 밥을 말아 김치에 드시고 계시고, 

거동이 불편해 움직이지도 못하고 밖에도 못 나가 보신다. 

우린 그들에게 자라나 이렇게 뛰어놀고 어울려 다니면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나 물질적인 것들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길러온 자식들 곁에 지내는 것일 것이다. 

어른, 학생 할 것 없이 모두 배려와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각박한 산업 자본주의 사회에 옛날 유교 사회의 머리 땋은 효자가 돌아올 수 있도록 

함께 좁은 방으로 들어가 작고 초라해져 버린 어깨를 가슴에 안아주었으면 좋겠다. 


학교로 다시 돌아가는 길.

날씨는 아직도 무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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