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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두달홍천살이 Sep 05. 2020

노숙자 문제: 인도주의와 인권 사이 딜레마

노숙자는 사회-인권적 문제인가, 그들의 자유로 존중해야 하는가?

요즘 내 관심사 중 하나는 노숙자. 개인의 주거 공간이 없거나 있음에도 공공장소에서 장기적으로 먹고 자고 생활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보통 우리는 이들을 불쌍하고 자비의 마음을 베풀어야 할 대상,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로 바라본다. 나 또한 그렇다. 사람은 안전한 집에서 살고 자는 게 권리이자 도리이니까. 불가피하게 능력이 안돼 노숙자가 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자발적으로 노숙자가 된 사람들도 있다는 걸 알았다. 보통 이들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 술이나 약물에 의존하는 중독자이거나 편집증적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다. 



1900년대 후반에는 권위주의 정부에서 거리의 노숙자들을 폭력적으로 시설에 감금해 관리하기도 했다. 2005년 서울시는 대대적으로 서울역에 있는 노숙자들을 강제로 내쫓아 보호 시설에 넣어 인권운동가들의 비난을 샀다. 그렇다, 노숙자들의 인권까지 보호해야 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노숙이 법적으로 죄가 되지는 않는단다. 사회는 충분하지 않은 조건에서 야외에 기거하는 그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줘야 할 인도주의적 의무가 있으면서도 그들을 존중하며 접근해야 할 책임도 있다. 그래서 노숙자들을 시설로 인도하거나 할 때 그들의 승낙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 길에 남고 싶다고 하면, 원하는 대로 하게 해 줘야 한다. 시설에 억지로 넣더라도 이미 자유로운 거리의 삶에 익숙해진 그들은 시설의 규칙과 간섭이 싫어서 결국 다시 뛰쳐나온다고 한다. 그들의 결정이기에 다시 거리로 나가는 걸 말릴 수 없다고 한다. 결국엔, 노숙자들이 스스로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내리도록 사회는 지속적으로 설득하고 유도하고 관심을 주는 수밖에 없다고 해석된다. 이 모든 관점들을 며칠 전 직접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최근 두 달간 나는 출퇴근 길에 반복적으로 한 노숙자 할머니를 봐왔다. 수레에 짐 가방을 몇 개 지고 도보 한복판에 앉아 있다. 밤에 운동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도 할머니는 거기 앉아 늘 그렇듯 신문지를 뒤적이며 앉아 있다. 잠잘 때는 방석처럼 보이는 어떤 가방 하나에 기대는 게 전부 같아 보였다. 지난 목요일에 강풍과 함께 비가 왔고 할머니는 지하철 출구 지붕 아래 피신을 한 듯했다. 금요일 점심에 잠깐 외출했다가 할머니를 봤다. 늘 그렇듯 마음이 좋지 않았다. 다이소에 들려 내가 필요한 물건을 사고 나오다가 다시 들어가 물이랑 방석, 담요, 과자, 사탕을 샀다. 돌아가는 길에 할머니에게 다가가 왜 거리에 계시냐고 물으며 산 것들을 줬다. 예상외로 정상적인 정신을 갖고 있는 말투로 답변하셨다. 배가 고프다길래 "뭐 드실래요 김밥? 빵?" 했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저 지하에 있는 00 식당의 육개장이 먹고 싶다"라고 정확하게 요구한다. 살짝 당황했지만, 가서 계산해 드릴 테니 같이 식당으로 내려가자 했더니 자기는 여기 있을 거라며  배달을 시켜 달란다. 식당에 가서 주문하며 계산을 하는데 사장님이 이런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란 듯이 “그 할머니가 사 달래요?” 이런다. 내가 "자주 이렇게 사 주는 사람들 있어요?" 물었더니 그 할머니를 한심해하는 표정으로 "네, 자주 있어요" 한다. 그때부터 기분이 좀 찝찝했다. 생존이 절박한 비자발적 노숙자가 아닌, 사람들의 선의에 의존해 자발적으로 노숙자 삶을 이어 가는 듯한 느낌. 배고픈 사람이 다른 메뉴 중에서 가장 비싼 8천 원짜리 육개장을 요구한다? 나는 내 선의에 조금은 민망했다. 



할머니는 맨 정신인 듯한 말투로, 자기는 나라에서 받을 집이 있어서 길에서 기다리는 것뿐이며 경찰서에 찾아가 그걸 곧 받아낼 거니 걱정 말란다. 사는 집이 있단다. 그냥 길에 쉬는 거란다. 시설 알아봐 드리냐니까 아주 단호하게 "됐다" 하며 자기가 알아서 알아본 단다. 자발적인 노숙자임이 느껴졌다. 그런데 도대체 왜 길에 나와 주무시냐고요. 보는 사람들 불편하게. 너무 답답했다. 아무리 맨 정신 같아 보여도 할머니 말하는 논리로 봐서는 정신적으로는 문제가 있는 듯 보였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해결할 거라고 믿고 또 괜찮은 척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회사에 와서 이분을 어디에 알리면 잘 해결해 줄까 고민하며 비슷한 사례를 찾아 네이버를 검색했다. 같은 사례가 있었는데 경찰에 신고를 했더니 경찰은 그냥 그 노숙자를 다른 데로 가게 하거나 신원 조회 후 복지 시설에 양도하는 등 역할만 할 뿐, 장기적 처방을 못한단다. 사람들이 올린 댓글을 읽으며 노숙자의 인권에 대한 공권력의 한계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그러다 어느 댓글에 구청마다 부랑인 보호를 담당하는 사회복지사가 있다는 내용을 보고 경찰서 말고 종로 구청의 사회복지과 자활 주거 팀 소속 노숙인 보호대책 업무 담당 복지사를 찾아 직접 전화를 걸었다.  내 묘사를 듣고는 어디 구역에 가방들을 수레에 끌고 다니는 사람 아니냐며 그 할머니를 이미 알고 있단다. 충격을 받은 게, 그분이 노숙자로 산지는 벌써 십 년이 넘었단다. 수십 번 권유도 해봤지만 시설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했단다. 그 삶의 방식과 논리가 고착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당사자만 원하면 수개월간 임시 주거 지원도 되고 주 정착 주거지가 있으면 생활비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이런 기회가 있는데도 거리에 그렇게 살아간다고? 분명 정신적 문제가 있어 스스로를 돌볼 수 없는 상황이다. 내가 그럼 그렇게 정신 질환이 있는 노숙인이라도 시설에 들어가는 걸 원치 않는다면 인권 존중(개인 의사 존중)이라는 명분 하에 "방치" 해도 되는 거냐고 물으니, "방치"라는 단어에 자신들이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비판으로 생각하셨는지 갑자기 발끈하시면서 마치 내게 화를 내는 듯한 목소리로 자신들은 할 도리를 다 하지만 그분이 원하지 않아 해서 인권 문제로 우리가 강제할 수도 없어 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토해 내신다. 알겠다고 그러냐고 진정하시라고 하고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분도 우리도 더 자주 찾아뵙고 이야기 나눠 보겠다고 하고 끊었다. 



 한 사람을 도우려 한 나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고, 헛수고였다.  망연자실하다가 그래도 해결 방법이 있을 거라 생각한 끝에 결국, 노숙자들이 스스로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내리도록 사회는 지속적으로 설득하고 유도하고 관심을 주는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들의 부랑 행동의 근원이 무엇인지 지속적인 소통과 대화의 시도를 통해 이해하고, 그들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도움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조심씩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 그들의 정신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사회 복지사, 공동체 이웃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무얼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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