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혼비 <다정소감>
처음 이 책을 접한 건 올해 봄 즈음, 내 진짜 동생 나영의 집에서였다. 쉬는 날이었나, 주말이었나,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아무튼 나영의 집에 방문해서 둘이 함께 달리기를 하고, 24시 국밥집에서 선지 국밥을 사 먹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자매데이였다. 무슨 이야기 끝에 나영이 '언니 김혼비 알지? 이거 읽어봐.' 하면서 이 책의 [거꾸로 인간들] 편을 펼쳐서 건네준 후, 자질구레한 집안일을 마무리하러 잠시 자리를 비웠고, 나는 소파 위에서 나영이 펼쳐준 그 편을 읽었다.
작가가 주말 축구를 하러 가는 길에 이용하는 두 버스의 잘 맞지 않는 시간대로 시작한 그 글은 축구 경기를 함께하는 쉰 살이 된, 곧 쉰 살이 될, 반올림하면 쉰 살이 되는 여성 세명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경기 전, 워밍업으로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윗몸일으키기를 하는, 작가가 명명한 '거꾸로 인간들'은 사람들이 흔히 내뱉는 '내 나이가 되면...'이라는 말을 거꾸로 사용한다. 보통 저 표현은 나이라는 것이 얼마나 잔인하고 사람을 나약하게 만드는 것인가를 호소하기 위해 쓰는데 저 언니들은 완전히 다르게 거꾸로 사용한다. 가령 이런 식이다.
(철봉에서 거꾸로 매달려 윗몸일으키기를 몸풀기로 하는 그녀를 보고 작가가 놀라고 있는 상황) "어유 야. 놀랄 것 없어. 너도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나도 네 나이 때는 딱 너 같았는데, 너도 내 나이 돼봐. 그럼 이렇게 할 수 있다니까?"
그리고 앞서 언급한 축구 하러 가는 길에 교묘히 타이밍이 맞지 않는 만드는 두 버스에 대한 괴로움을 작가가 토로할 때면 거꾸로 인간들은 이렇게 조언한다.
"야, 그걸 뭘 버스를 기다려. 그냥 뛰어와!"
나영의 집에서 읽었던 고작 하나의 목차가 어찌나 인상적이었는지, 나는 회사에서나 친구들과의 단톡방에서 이제 나이가 먹어서 뭘 못하겠다는 소리가 들려오면, '야! 이렇게 나이를 먹어가는 사람이었더라!'라며 읽었던 대목을 얘기해주곤 했다.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책이니까!라고 일축하는 부류, 오 진짜?라고 감동받는 부류, 별 관심 없는 부류, 여성 축구팀을 검색해 보는 아주 희소한 부류. 아무튼 나는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글을 읽어 보지 않았더라면 '아 그래? 역시 나이 먹는 건 서럽고, 우리는 역시 그냥 죽어가고 있을 따름이야..'라고 비관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제 나는 아주 희소하긴 하지만 희망찬 예외 케이스를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이 책은 거의 반년 간 쭉 나의 <읽어야 할 것> 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왜 진즉 책을 읽지 않았는지 설명할 수 없지만, 올해 117년 만이라는 11월 폭설의 날 퇴근길. 하늘에서 쏟아지는 하얀 배설물 덕분에 3시간째 움직이지 않는 빨간 버스 안에서 나는 구독 중인 E북 서비스를 열어 휴대폰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김에 기름 칠하는 솔을 보관하는 용도의 '김솔통' 같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작가의 다짐으로 시작한 <다정소감>은 저자 김혼비의 삶과 경험, 느낌과 생각들이 담긴 책이다. 특히 모든 순간 '다정'이 자신을 구원했다는 깨달음에서 비롯된 '다정함'의 수기가 상당수 담겨 있었다. 거꾸로 인간들 편 역시, 자신에게 열정을 불어넣어 준 쉰에 가깝거나 도달한 다정한 언니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모든 목차가 재밌고 좋았지만,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편은 (거꾸로 인간들 제외) [가식에 관하여]였다.
내 이름은 선영이다. 그리고 내 별명은 '홍식'이다. (내 브런치 아이디도 여기서 나왔다.) 내가 홍식이가 된 것은 대학시절 누군가 내가 가식적이라며 홍가식이라고 부르던 것에서 기인했다. 아직도 대학 동창들은 나를 홍식이로 부른다. 나를 좀 더 아끼는 친구들은 '식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러준다. 그러나 그 뿌리는 가식에 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학시절 했던 과외 아르바이트 학부모와 통화하는 것을 들은 누군가가 놀림반 진절머리 반으로 별명을 만들어내고 부르기 시작했던 것 같다.
친구들이 편하게 부르는 별명이 있어서 좋기도 했지만, 그 별명은 나를 검열하는 기준이 되었다. 나는 내가 가식적으로 보이는 게 창피했고, 가식적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10번 웃어줄 걸 5번만 웃었고, 20번 친절할 걸 10번만 친절하게 대했다. 다정하게 대해줄 수 있는 상황에서 일부러 차갑게 대꾸했고, 걱정되는 마음을 숨겼다. 홍식의 식은 가식에서 무심함과 냉정함을 뜻하는 'Chic' (부티나는 세련된이라는 뜻은 절대 아님)로 점점 바뀌어갔다.
그러나 [가식에 관하여]편에서 작가는 가식에 대해 이렇게 서술한다.
물론 그 가식에서 타인에게 나쁜 짓을 하려는 악의적인 의도가 없는 한에서. 가식에는 지금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어 보고자 하는 분투가 담겨 있다.
가식적이다라는 말에는 자기실현적인 면이 있어서 누가 그렇게 규정하는 순간부터 자신의 언행 하나하나가 가식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혹시 나 자신이 너무 가식적으로 느껴져서 견디기 힘든 날이 있는가?...(중략) 괜찮다. 정말 괜찮다. 아직은 내가 부족해서 눈 밝은 내 자아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내 '가식의 상태'를 들키고 말았지만, 나는 지금 가식의 상태를 통과하며 선한 곳을 향해 잘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
세상에! 가식에 대해 이렇게 다정할 수 있을까. 늘 놀림거리에 불과했던 나의 가식은 작가의 문장들 속에서 다시 해석되고 있었다. 스무 살 내가 들켰던 가식은 '친절'에 대한 노력이었음을 그리고 그 친절은 가난한 살림에 보템이 되고자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책임감과 부담감에서 시작했다는 것을 되짚어볼 수 있었다. 홍식이라는 별명을 얻고, 나의 친절과 따뜻함이 마치 연기처럼 여겨질까 전전긍긍하며 냉랭하고 무심한 모습으로 무장했던 꽁꽁 얼어붙었던 나에게 마치 '많이 춥지?'라고 건네는 따뜻한 핫초코 같은 문장들이었다.
나는 이제 홍식의 식을 '가식'으로 여기지 않고, 홍씩씩의 준말정도로 생각하려고 한다. 씩씩하고 용감하게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고, 미지를 개척하며, 먼저 다가갈 수 있는 사람. 콧바람을 씩씩거리면 힘차게 달리기를 하고 수영을 하는 열정가. 그것이 강화된 '홍씩'의 요즘 유행하는 말로 '추구미'라고 할 수 있다.
다정한 것은 정말 힘이 세다. 작가는 서문에서 눈에 띄지 않지만 딱 적당한 용도인 김솔통 같은 글을 쓰고 싶다고 했지만 <다정소감>의 모든 글들은 나에게 마치 진하게 우려낸 곰탕 같았다. 작가는 모든 것들은 얕게 생각하는 법이 없다. 책에는 작가 자신의 모든 경험과 생각, 그리고 지식을 몇 번이고 우리고 끓여내서 정말 다정이 철철 넘치는 글들이 담겨 있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부터 여성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 기저질환 환자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정한 작가의 글을 읽으며, 나도 이렇게 깊이 푹 고아진 생각을 하면서 살고 싶다는 마음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덧.
폭설로 오후 9시 20분에 시작한 퇴근길은 새벽 1시 30분에 끝이 났다. (보통 1시간 30분 정도 걸림) 눈길 언덕에서 미끄러지는 버스에 모든 승객이 중도하차해 무릎까지 쌓인 눈길을 수 km 걸어갈 수밖에 없었던 상황. 환상적인 첫눈이기는커녕 하늘에서 쏟아지는 배설물 혹은 폐기물에 대한 원망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그 시간. 나는 버스에서 읽기 시작했던 이 책 덕분에 주변으로 시선을 돌려 어떻게든 언덕길을 오르려고 안간힘을 쓰다 땀에 절어버린 버스 기사님과 제설 작업자 분들, 교통정리를 위해 눈길에 서 있는 경찰관 분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수줍지만 용기 내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렸다. 다정함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책에는 그런 노력을 기꺼이 하게 만드는 마법이 숨어 있는 것 같다.